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mi Mar 06. 2018

3. 책 <버마 시절>: 여행 전 얻은 깨달음으로

고집스럽게, 나의 버마

 제가 무례한 그의 장난에 예민하게 반응했던 이유는 여행 전 읽은 한 책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전의 저라면 그의 잘못을 순전히 개인적인 부덕의 탓으로 돌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제국주의의 자만심과 우월감까지 확대하여 해석하려 했던 데는 한 권의 책이 내 안에 날카롭게 새긴 흔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조지 오웰<버마 시절>(원제:Burmese Days)입니다. 



열린책들 세계문학 시리즈에서 2010년 번역/출간된 <버마 시절>. 여행 중 외국 배낭여행자들의 손에 들려있는 걸 (물론 원서로) 몇 번 보았다.   



 <버마 시절>은 버마(미얀마) 여행을 결정한 후 제일 처음 읽었던 책입니다. 미얀마에 대한 여행서적보다 먼저 찾았지요. 어떤 여행을 만들지는 내가 여행지의 어떤 부분을 느끼고 알아가고 싶은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행을 준비할 때 가장 먼저 그 나라의 역사나 문화를 다룬 대표적인 소설이나 영화를 찾아 보곤 해요. 역사책이나 위키피디아보단 훨씬 흥미롭게 접근할 수 있으니까요.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은 <동물농장>, <1984>등의 대표작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치적 성향이 강한 작가입니다. 이데올로기와 사회 구조적 모순에 대해 회의적이었으며, 작품 속에서 풍자나 비유를 통해 이를 신랄하게 비판했지요. 후반기의 그가 집중적으로 문제삼은 사상이 전체주의라면, 전반기에는 제국주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버마 시절>은 영국 경찰에 입대한 조지 오웰이 1922년부터 5년동안, 버마와 인도에 파견되어 근무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작품입니다. 생생한 체험에 작가의 비판적인 성찰이 덧붙여져 탄생한 문학적 결정체인 거죠.


 그래서일까요. <버마 시절>은 처음 이 작품을 선택한 저의 기대를 빗나갔습니다. 버마의 역사와 문화에 접근하기 위한 우회로로 삼았던 이 책은 그것의 형상만 언뜻언뜻 비쳐줄 뿐 전혀 다른 곳으로 나를 인도했습니다. 바로 식민지시대의 제국주의자들의 민낯이입니다. 타민족과 문화를 멸시하고 혐오하며 식민지 위에 군림하면서 그들만의 권력과 탐욕을 채우는 데만 열중했던 그들. 조지 오웰은 식민통치의 대리인으로 경험했던 고통과 참담함을 한 작가로서 낱낱이 고합니다. 





‘그런데, 의사 선생.’ 


플로리가 의자에 기댄 채 말했다. 


‘구역질 나는 클럽을 벗어나 이곳에 오니 참 즐겁소. 당신 집에 올 때면 난 매춘부와 함께 시내를 빙 둘러서 집으로 가는 이교도 신부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들로부터 해방되는 영광스러운 휴일이죠.’ 


그는 뒤꿈치를 들어 클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나의 사랑하는 제국주의 건설자로부터 말이오. 영국의 권위, 백인의 짐, 두려움도 없고 비난도 받지 않는 훌륭한 나리님들- 당신은 알고 있지요. 그런 썩은 냄새로부터 잠깐 동안이나마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친구, 나의 친구, 정신 좀 차려요, 제발! 너무 심한 말 같군요. 고귀한 영국 신사들을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죠!’     






 소설의 주인공 플로리는 버마로 파견된 영국인 관리지만 그곳에 함께 주둔하는 영국인과 이들의 사교 모임인 클럽을 환멸합니다. 그들은 버마의 문화를 존중하고 차별 없이 버마인을 대하는 플로리를 영국의 권위와 품격을 깎아 내린다고 여기기 때문이지요. 플로리가 영국인만 소속될 수 있는 클럽에 그 지역의 유능하고 덕망높은 버마 의사를 가입시키려고 하면서 이들의 대립은 더욱 심해집니다. 거기다 클럽에 최초로 가입하는 특권을 가로채고 싶어하는 버마 정치인의 계략이 더해지고, 플로리가 도시를 방문한 세속적인 영국인 여인과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이야기는 복잡하게 전개됩니다. 


 소설의 간략한 소개만으로도 주인공 플로리에 작가인 조지 오웰이 꽤나 많이 투영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작가 역시 버마에서 근무 당시, 영국 사교계 모임에 나가기보다 혼자 여행을 하며 언어와 문화를 배우려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플로리는 작품에서 버마의 특이한 생활양식, 버마인의 생김새와 성향에 대해 편견 없이 서술하는 유일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영국인들의 따가운 시선 때문에 생각을 자유롭게 드러내지 못하죠. 식민지에서의 사회적 생존을 위해 영국인 클럽을 완전히 배반할 수 없다는 점, 또 자신이 혐오하는 특권의식을 스스로 완전히 떨쳐내지 못한다는 점에 플로리는 괴로워합니다. 그리고 이는 그를 비극적인 결말로 몰아가죠. 


<버마 시절>은 한 국가의 역사와 문화를 지엽적으로 접근하려는 저의 꼼수를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이 작품이 위대한 까닭은 한 시대의 생생한 기록이면서 자신의 부조리를 성찰한 소신 있는 증언임에 있습니다. 이 책에서 꼬집는 편견과 차별, 자만과 배척 등은 특별한 시대적, 계층적 성향이 아닌 인간이 빠지기 쉬운 보편적인 오류임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지요. 제가 어느 미국인 노인의 유치한 장난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었던 데는 이 작품에 진 빚이 많습니다. 생각의 창이 많아지면 그만큼 다양한 정보나 자극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만약 버마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면, 아니, 여행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세계를 한뼘 넓히고 싶다면 <버마 시절>을 꼭 읽어보세요. 




버마 파견근무 당시의 조지 오웰. (출처:위키피디아)


조지 오웰이 마지막 근무지였던 KATTA의 영국인 클럽 건물. 소설에서 묘사된 영국인 클럽과 느낌이 비슷하다. (출처: 위키피디아)


매거진의 이전글 2. 양곤 순환열차: 여행자의 기본에 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