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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Aug 24. 2018

사이버공간, 흔적 그리고 스펙터클의 시대

영화 <서치>의 새로운 화법

 같은 이야기라도 어떤 방식으로 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읽힐 수 있습니다. 일상적인 대화에서조차 단어나 말투, 어조에 민감한 저는, 새로운 ‘화법’에 대해서 관심이 많아요. 영화 <서치>는 그래서 저에게 매우 신선하고 흥미로운 영화였습니다. <서치>에서는 인물을 따라 움직이는 전형적인 카메라의 움직임을 거의 볼 수 없거든요. 영화의 대부분은 그의 컴퓨터 또는 딸의 노트북 화면 속에서 전개됩니다. 우리는 컴퓨터를 통해 접속한 사이버공간에서 모든 이야기를 봅니다. 아니, 어쩌면 엿보게 된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네요. 


 데이빗은 마고의 아버지입니다. 마고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주기도 했던 자상한 어머니는 마고가 초등학생 시절 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데이빗은 더 이상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그건 마고가 가장 그리워하는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아버지와 나눌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친구 집에서 밤새 스터디를 할 거라는 딸은 그날 새벽 부재중 전화 세 통을 남기고 돌아오지 않습니다. 뒤늦게 실종신고를 한 데이빗은 사건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마고의 노트북으로 그녀의 SNS에 접속하지만, 그곳에 남겨진 딸의 모습은 너무나 낯섭니다. 그는 자신이 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괴로워합니다. ‘내가 알던 딸이 아닌 것 같아.’ 이 중얼거림에는 딸의 진짜 모습을 보지 못했던 아버지로서의 죄책감이 묻어있죠. 그녀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났면 그건 자신의 탓일 거라는 깊은 자괴감. 


데이빗과 딸의 마지막 통화. 영화의 대부분은 이렇게 데스크톱 화면을 통해 전개됩니다. 바삐 움직이는 마우스로 접속되는 가상의 세계. 관객의 눈은 바쁘게 이곳의 속도를 쫓죠.





 가장 가까운 가족일지라도 우리는 엄연한 타인입니다. 친한 친구나 연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기억과 감정을 공유할지라도 우리는 누군가를 완전하게 알 수 없죠. 아마도 친밀하고 가까운 관계이기 때문에 차마 보여주지 못하는 면들이 분명 존재할 것 입니다. 관계에서는 끈끈한 유대와 서로에 대한 책임과 의무 같은 것들이 존재하는데, 간혹 그것들이 온전한 나를 보여주는 데 걸림돌이 되기도 하지요. 그러한 의미에서 사이버공간은 현실의 대안처가 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진짜 나를 모르는 곳에서, 완전한 타인 틈바구니에서, 여타의 망설임 없이, 나를 드러낼 수 있으니까요. 그곳은 현실과 대비되는 가상성, 익명성, 무관심으로 이루어진 세계입니다. 혈연/지연/학연이 아닌 순수한 취향과 관심사로 모인 집단이면서 나의 선택에 따라 쉽게 접속했다 간편히 끊을 수 있는 세계이기도 하죠. 구속과 제약이 없어 자유롭지만, 그 자유가 넘쳐 방종과 방임으로 쉽게 변질되는 곳 말이예요.  

 

 마고는 실제 세계에서 드러내지 못한 모습(드러내선 안 된다고 생각했던 모습)을 사이버공간에 풀어놓았기 때문에, 아버지로서는 SNS속 딸이 낯설게 느껴질 수 밖에 없었을 거예요. 그러나 그건 오롯이 아버지의 문제가 아니라 가상공간이 가진 특징과도 관계된 문제일 거라 생각해요. 우리 모두가 그렇지 않을까요? 나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 속에서 대범해지는 자신을 발견한 적 있을 테죠. 그러나 익명과 타자가 선사하는 자유는 또한 양날의 칼입니다. 사이버공간이 현실의 확장판이 될 수도 있지만, 어떤 이는 불만족스러운 현실에서 해방되기 위한 도피처로 선택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위장된 타인으로 살아가는 연극무대처럼 이용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각기 다른 세계로 가상공간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뒤엉켜 이미 사이버공간은 거대한 카오스의 세계가 되어버린 거겠죠. 



딸 마고가 개인 스트리밍 방송을 한다는 걸 아버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죠. 게다가 이런 우울한 표정들로 힘들어했던 그녀일 줄은!






 이러한 문제를 지적하는 <서치>는 새로운 보여주기 방식을 도입해서 더욱 신선합니다. 데이빗을 포함한 영화 속 인물들은 카메라가 직접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페이스타임(영상통화)을 하는 영상을 통해 간접적으로 보여집니다. 딸의 수색장면은 뉴스채널의 온라인 생중계 영상을 통해 보여지고, 장례식은 장례업체 서비스가 제공하는 온라인 장례식 생중계를 통해 보여지죠. 이제 우리 세계의 모든 순간들이 사이버공간을 통해 매개되고 기록으로 남겨진다는 사실은 자명합니다. 또한 영화 속 반사된 영상들의 제한된 화각은 <서치>의 긴장감을 높여줌과 동시에 중요한 통찰을 안겨줍니다. 사이버공간에서 모든 것을 날 것으로 생생하게 바라본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그 현실성 또한 제한적이라는 걸 말이죠. 


 ‘스펙터클(spectacle)’이란 개념이 있어요. 본래 쇼를 뜻하는 라틴어(spectaculum)에서 온 단어인데, 단순하게 말해 ‘특별한 볼거리’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현대사회의 특성으로 말해지는 스펙터클은 부정적인 의미가 큽니다. 즉, 현대사회의 개인들은 세계를 표면적인 이미지로만 소비하면서, 실제 삶에서의 사회적인 관계는 약해지고 진정성에서 멀어진다는 지적입니다. 이는 시각미디어라는 매체의 급속한 발전과도 깊은 연관이 있는데, 가령 9.11 테러 장면이 미디어를 통해 반복적으로 재생되면서 사람들이 이 테러의 잔혹함과 비극에 통감하기 보다 영화의 극적인 씬처럼 자극적인 장면으로 치부하게 되는 사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영화 내내, 컴퓨터 화면을 통해 전개되는 긴장감 있는 추적을 바라보면서 저는 계속 생각할 수 밖에 없었어요. 나 자신이 딸을 잃은 주인공의 감정에 이입하기보다 그저 이 실종에 관심이 있는 구경꾼으로서 이 영화를 소비하고 있지 않나 하고요. 


 


 더욱 많은 분들이 이 영화를 찾아보며 비슷한 고민들을 해볼 수 있도록 스포일러가 될 만한 이야기는 최대한으로 삼가했어요. 사이버공간에서 스스로의 정체를 감춘 채 극악해지는 사람들, 혹은 정체를 위조해 거짓기록을 양산해내는 사람들. 진위와 관계없이 자극적인 정보들이 순식간에 퍼지고, 진심이 결여된 공감과 응원과 애도가 넘치는 이유는 아직 우리가 이런 고민들을 진지하게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자신의 딸을 믿고 끝까지 추적을 이어나가는 아버지의 집념도, 구글의 놀라운(동시에 겁이 나는) 검색 기능과 자동 정보저장 기능도 이 영화의 매력이지만, 무엇보다 영화가 우리에게 세계를 새롭게 보여주는 방식과 그 방식이 품은 여러 질문들을 더욱 깊게 생각해보셨으면 해요. 




 사설이지만, 영화를 보고 돌아오면서 내가 사이버공간에 남겼을 나의 흔적들을 되짚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흔적들을 조각보처럼 엮어내어 나를 재구성한다면, 그건 지금, 현실의 나와 얼마나 닮을까,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죠. 여러분은 지금 어떤 흔적을 남기며 이곳에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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