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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Aug 31. 2018

추상으로 보는 세계의 다른 차원

금호미술관 기획전 <Flatland> 전시 리뷰


 금호미술관의 <Flatland> 전시명은 에드윈 애보트 Edwin A. Abbott의 『플랫랜드:고차원들의 모험담 Flatland: A Romance of Many Dimensions』(1884) 작품명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합니다. 소설 플랫랜드의 주인공은 2차원 세계에 살고 있는 사각형이예요. 이 사각형은 다른 차원의 세계들을 차례로 여행하게 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죠. 언뜻 우화처럼 들리기도 하는 이 이야기는, 추상적인 도형을 통해 기하학의 패턴과 차원(dimension)에 대한 문제를 사유한 독특한 시도입니다. 새로운 ‘차원’에 대한 상상력을 보여준 영화 ‘인터스텔라’의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도 이 소설을 매우 흥미롭게 읽었다고 하죠.


 <Flatland> 전시의 기획 의도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 전시는 세계를 이해하는 시도로서 ‘추상이 지니는 동시대 미술에서의 의의’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전시에 참여한 7명의 국내작가는 기하학적 형태를 활용하거나 조형적 요소를 사용하여 창작을 합니다. 모두가 세계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추상화하여 보여준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그래서 전시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 없이 작품을 만나면 당황스럽고 난해할 지 모릅니다.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라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 있죠. 그러나 먼저 말을 건네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 의미도 없는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관람객인 우리가 먼저 다가가서 어떤 대화가 오갈 수 있는지 고민해야만, 작품은 말을 하기 시작할 거예요. 제가 개인적으로 재밌는 대화를 나눴던 3점의 작품을 꼽아봤어요. 


 



박미나, <12 Colors> 시리즈 중 일부, 2013, 리넨에 유채, 각 27.3 x 27.3cm



1.

 박미나 작가의 <12 Colors> 연작은 <Flatland>의 문제의식을 가장 잘 다루고 있는 작품입니다. 12개의 사각캔버스에는 유화 물감 회사에서 판매하는 12색 세트의 색상이 칠해져 있습니다. 각각의 브랜드는 전혀 다른 색상으로 구성되어 있고, 같은 색상일지라도 채도의 차이가 존재합니다. 12색의 구성은 임의적이고 우연적입니다. 어떤 브랜드의 물감 세트를 사느냐에 따라 작품의 색감도 달라지겠죠. 우리의 인식의 틀도 12색 세트와 같지 않을까요? 누가 어떤 기준으로 만들었는지 모를 생각의 틀과 방식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여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닐까요? 








최 선, <나비>, 2014-2017, 캔버스에 잉크, 각 160 x 914 cm (6점)


2. 

 마치 푸른 나비떼가 날아가는 광경처럼 보입니다. 화면에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면 나비처럼 보이던 형체는 푸른 잉크의 조각들임을 눈치챌 수 있죠. 그 조각들 안에는 희미한 흔적이 남아있는데 그것들은 모두 사람들의 숨입니다. 나비의 날갯짓은 푸른 잉크에 사람들이 불어넣은 숨으로 트인 길인 셈입니다. 최선 작가는 개개인들의 유대를 가능하게 하는 계기를 숨, 호흡에서 찾았습니다. 인간이 내뱉는 숨은 우리 존재의 연약함을 증명해주는 동시에, 몸의 안과 밖–우리와 세계-을 이어주죠. 커다란 화폭에 수많은 이들의 숨결을 모았던 것은 각자의 고독과 슬픔이 모두의 것으로 모아질 때 아름답게 승화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김용익, <유토피아>, 2018, 캔버스 및 벽면에 연필, 비닐 시트, 가변크기


3. 

전시 공간의 벽면에는 잘 보이지 않는 원들이 배열되어 있습니다. 그 원들은 캔버스와 만날 때 검거나 붉은 색으로 형체를 드러내게 됩니다. 이 원들은 번뇌입니다. 세상에는 괴로운 욕망과 고통, 고민들이 존재하죠. 캔버스는 인간입니다. 세상에서 어떤 위치에 놓이느냐에 인간은 특정한 번뇌를 자기 안에 품게 됩니다. 원의 정렬을 벗어나 걸린 캔버스는 텅 비어 있습니다. 이 캔버스는 작품명이기도 한 <유토피아>를 상징합니다. 구속과 번뇌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존재이지요. ‘땡땡이 회화’로 불리기도 한다는 김용익 작가의 시리즈는 모더니즘 미술에 대한 저항에 기반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공간 전체가 하나의 작품이 되는 <유토피아>는 내포한 여러가지 상징성 때문에 흥미로운 질문들을 품게 만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어떤 지점에 놓인 캔버스라고 생각하실지 궁금하네요.  



6월 1일에 시작한 이 지성적인 전시는 금호미술관에서 9월 16일까지 관람하실 수 있어요. 한여름의 무더위가 끝난 듯한 선선한 요즘, 경복궁 돌담을 끼고 천천히 서촌을 걸어올라가 들려보세요 :) 





금호미술관 

서울 종로구 삼청로 18 (사간동 78)

매일 10:00 - 18:00월요일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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