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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3)

멸치들의 역주행

by 김세광

살아가면서 마음먹은 일이 좀처럼 풀리지 않거나 앞날이 막막해질 때면 고향의 바다가 떠오르곤 했다. 수평선까지 길게 펼쳐진 바다를 보면 아무 욕심도 없었던 처음으로 돌아간 듯 마음이 새로워지곤 했다. 유년 시절의 고향은 언제나 내 마음 가까운 곳에 닿아있었고 잊지 못할 추억들을 선물해주었다. 그러나 때때로 정물과 같은 조용함과 변화 없는 일상은 권태롭기도 했다. 무엇보다 좁은 땅에 갇혀 산다는 답답함과 보이지 않는 미래 때문에 막막해지기도 했다. 그래서 종종 세상이 뒤집힐 만한 큰일이라도 생겼으면 하는 엉뚱한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중학교 다닐 때 쯤으로 기억된다.

어느 날 밤 문밖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나를 깨웠다. 멀리 어둠을 뚫고 들려오는 사람들의 높고 낮은 소리들은 서로 부딪히며 뒤엉켜있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한데 엉켜있는 소리들을 하나씩 풀어내듯 귀를 기울였다. 그 속에는 날카로운 고음, 쫓기는 듯한 다급함, 안타까운 비명, 때로는 환호가 섞이기도 했다. 소리만으로는 알 수 없는 평소와는 매우 다른 일이 일어나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나는 이불을 밀치고 황급히 밖으로 나왔다.


난데없이 나를 불러낸 가을밤은 차갑고 어둠은 짙었다. 언덕 아래 모래밭 위로 띄엄띄엄 장작불이 타고 있었고 매캐한 연기가 밤하늘로 퍼지고 있었다. 좀처럼 볼 수 없던 낯선 풍경이었다. 불빛 아래로 많은 사람들이 꿈틀대며 웅성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불을 밝힌 것이 어둠 때문인지 추위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혼잡한 장터에 모여든 사람들처럼 바쁘게 바다와 모래펄 사이로 움직였고 사람들이 손에 든 그물 속에는 심하게 꿈틀거리는 것들이 있었다. 그것은 놀랍게도 멸치떼였다. 멸치들은 그물 밖으로 벗어나려는 듯 쉴새 없이 튀어 올랐고 쓰러진 채 몸을 부르르 떨기도 했다. 멸치들이 움직일 때마다 허공에서 반짝거리는 은비늘이 눈부셨다. 수심이 얕은 바다에도, 파도가 밀리는 젖은 모래 위에도 멸치들은 팔딱거렸고 도시의 네온처럼 모래펄을 밝혔다.


처음에는 바다에 있어야 할 멸치들이 왜 모래펄에 누워있는지 알지 못했다. 불빛에 비치는 은빛 멸치의 반짝이는 풍경은 몹시 낯설었고 아름다웠다. 멸치들이 떼를 지어 얕은 물가를 헤집고 다니거나 모래펄로 틔어오르자 사람들은 다급하게 집으로 달려가 뜰채와 바구니를 꺼내왔다. 수심이 깊은 곳에는 이미 어른들이 배를 띄워 갈치를 잡고 있었다. 무거운 그물을 올릴 때마다 영차! 영차! 힘을 모으는 소리는 먼 곳까지 울렸다. 얕은 바닷가에 늘어선 사람들은 긴 띠를 만들어 작은 그물이나 바구니를 펼쳤다. 허공으로 튀어 오르는 멸치 떼를 보니 마음은 급해지고 무거운 멸치를 옮기자니 모래밭에 발이 푹푹 빠졌다. 그물로 들어오거나 빠져나가는 멸치 떼를 볼 때마다 “와아, 와아!”하며 열광했다. 사람들의 함성은 꼬리를 물고 밤하늘로 퍼져갔다. 거대한 멸치떼들은 조용했던 사람들을 이상한 곳으로 끌고 다니는 것 같았다. 귀를 따갑게하는 고함소리와 부릅뜬 눈, 거칠은 숨소리가 가득한 모래펄은 온갖것들이 뒤죽박죽이 된듯한 혼돈의 세상이었다. 어제와는 너무 다른 이상한 나라에서 열광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혹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뒤집어지지 않을까?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잡혀 온 멸치들은 모래펄 가운데쯤에 동산처럼 쌓여있었고 부모의 성화에 이끌린 아이들은 졸리운 눈으로 그들을 지키고 있었다.

몰려오는 멸치떼들을 보며 모두가 열광하고 환호했지만 멸치들은 먼바다에서부터 줄곧 갈치들의 공격에 쫓겼다. 안타깝게도 그들이 마지막으로 다다른 곳이 하필 바다가 끝나는 모래펄이었다. 더이상 돌아갈 수도 숨을 곳도 없는 모래 위로 자폭하듯 드러눕고 말았다. 그때는 까맣게 몰랐다. 멸치들이 죽을 힘을 다해 모래펄을 향해 달려왔던 이유를, 단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하늘이 은혜를 베푼 것이라 믿었을 뿐이었다. 유일한 살 길이라 믿고 달려왔던 멸치들은 얼마나 난감했을까?

밤새 멸치를 잡느라 지친 기색이 완연한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에고! 살다 보니 세상에 이런 날도 오는구나, 무지랭이 같은 우리에게도....” 오랜만에 활짝 웃는 어머니의 얼굴 너머로 당신이 걸어왔던 험하고 힘겨웠던 세월이 언뜻 지나가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은 감쪽같았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는지 반문하듯 조용하게 해가 솟았고 마을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피곤에 지친 사람들은 늦잠을 즐겼고 골목을 에워싼 초가집 지붕 위나 마당, 긴 돌담에 반짝거리는 멸치들이 꽃처럼 누워있었다. 멸치들 덕분에 그해 겨울을 따뜻하게 보냈던 기억이 난다. 기쁨으로 가득했던 소리가 어떤 경로를 통해 다가오는지 거칠었던 시간들이 어떻게 사라지는 것인지 볼 수 있었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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