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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가장 개인적인 체험이다

by 심재훈



가족과 함께 살면서 기억에 남는 건 다 같이 거실에 모여 영화를 본 시간들이다. 특히 아버지가 내게 남긴 건 어렸을 적에 봤던 그 영화들이었고 나는 그렇게 영화와 친숙해졌다. 아버지는 영화 보는 걸 좋아하신다. 가족이란 건 함께 사는 사람의 피와 습관을 유산처럼 물려받는, 그 모든 과정을 통틀어 부르는 단어와 같다. 어려서부터 남은 기억이 나에겐 이제 취미 생활이자 인생의 일부가 되었다. 그건 내가 기쁨을 누리는 본질적인 근원이 되었다. 그래서 나도 영화 보는 걸 좋아한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공부하느라 책 읽을 시간은 없었어도 영화 보는 건 놓치지 않았었다.


우리 가족들은 주말이면 아주 규칙적으로 영화관에 갔다. - 그게 얼마나 규칙적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가지 않았나 싶다. - 굳이 영화관을 가지 않더라도 집에서 영화를 보기도 했다. 내가 어렸을 적만 해도 우리 집 앞 만화방엔 DVD도 함께 빌릴 수 있었다. 아버지가 건네주신 천 원 몇 장을 들고 동생과 함께 만화방으로 향했던 거다. 꽂혀있는 컬렉션을 보면서 한참을 고민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때는 심오한 영화보다 타임 킬링용 무비들 위주로 골랐던 것 같다. 액션, 스릴러, 누아르, 케이버 무비 같은. 솔직히 그 당시에 봤던 영화들이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짧으면 한 시간 반, 길면 두 시간가량의 DVD는 그저 내 자아를 어느 다른 세계로 빠뜨릴 수 있는 멋진 장난감 내지 아주 흥미로운 도피처 같은 거였다. 거실에서 더 이상 공부하기 싫을 때 나는 내 마음속에 우연의 여신에게 이 자리에서 빨리 좀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곤 했다. 그런데 마침 저녁 늦게 퇴근하고 돌아오신 아버지가 보였고 그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구원의 메시지를 보냈던 거다.




오늘 저녁엔 다 같이 영화 보자!




그 한 마디가 나에겐 모든 걸 의미했고 구원과도 같았다. 그때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라면 첫 번째는 축구였고 두 번째는 무언가를 보는 거였다. 그 무언가가 사랑과 전쟁 같은 드라마일 수도 있고 영화일 수도 있었다. 때로는 그렇게 가족끼리 영화관을 가는 게 귀찮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버지의 영화를 향한 욕심이 나머지 가족들에게는 부담이 될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 당시 나는 순진무구했고 엄격했던 아버지나 깐깐했던 어머니 앞에선 ‘네’라는 순응의 대답 외에 다른 반응을 한다는 건 꿈에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지금 내 반골기질은 선천적인 영향도 있겠지만 그 어렸을 적에 제대로 된 자유를 누리지 못한 데서 온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보는 경험들을 많이 갖게 됐다. 그 보는 시간들은 쾌락적이면서도 때로는 수련(修練)의 시간과도 같았다. 그래서 지금 나는 영화 보는 게 그렇게 어렵지 않다. - 어떤 사람들은 영화 보는 걸 굉장히 힘들어한다. 그게 아무리 재밌는 영화라고 해도 말이다. 한정된 공간에 정적인 상태로 무언가를 오랫동안 보는 건 생각보다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구에게 일주일 또는 2주에 한 번씩 영화를 보라고 하면 못하겠다고 포기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거다. - 영화 보는 거에 익숙해지고 또 그 영화라는 한정된 프레임과 스크린, 한글 자막과 장면 장면마다 나오는 편집 점들은 영화란 게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내 삶에 무엇을 남기고 끝나는지 그 의미를 천천히 되새기게 해 주었다.


그때 봤던 영화들이 뭐였는지 정확히 기억할 순 없지만 – 물론 연대기를 거슬러 찾아보면 다 알 수 있겠지만 – 몇몇 영화들은 아직도 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 특히 일본 영화였던 「하치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왜 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내가 그리고 우리 가족들이 강아지를 너무 좋아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이 영화가 너무 슬퍼서였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린 소년의 입장에서 느꼈던 그때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 가족이 갖고 있었던 특유의 폐쇄성 – 우리 가족 주변엔 항상 베일 같은 게 씌워져 있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아무리 격정적인 일이 있더라도 우리 가족들은 마음이 따라가는 대로 울지 않았고 웃지 않았다. 나는 그런 분위기 때문에 조금 답답함을 느끼곤 했다. 덕분에 나는 스스로 감정을 삭이는 법을 어려서부터 깨우쳤다. - 이 없었더라면 아마 나는 바짓가랑이를 부여잡고 울지 않았을까. 그 이야기는 참 슬펐었다. 사람이냐 동물이냐에 상관없이 어느 가엾은 피조물을 향한 시선, 그게 영화를 통해서 극대화되었고 내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기준으로 발전했던 거다. 하물며 ‘개’라니. 나는 고양이는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도 개는 너무 사랑한다. 어렸을 적에 키웠던 진돗개 ‘재돌이’와 영화를 보기 시작했을 때쯤 키우기 시작했던 슈나우저. ‘테리’는 아마 그 「하치 이야기」를 함께 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는 갓 새끼로 태어나 데려왔을 때니까 정말 조그마했을 것이다. 그 아이는 내 이불 옆에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개들도 사람처럼 특정한 인간에게 더 깊은 유대감을 느낀다고 한다. 내가 그들의 입장이 되어볼 수는 없지만 난 어느 정도 그들에게 좋은 향기를 내뿜는 존재일 거라고 생각해본다. 난 개와 그 특별한 유대감을 느껴봤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느낄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직접 키워봐야 알 수 있는 종류의 감정일 것이다. 개는 인간과 달리 잘 배신하지 않는다. 한 번 깊은 유대감을 느낀 상대에게 모든 걸 바친다. 인간보다 조금 지능이 떨어진 피조물이어서 일까. 더 많은 자유의지가 있어서 충성할 수도 있고 배신할 수도 있는 인간이라는 영장류가 과연 개보다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건지는 … 잘 모르겠다. 확실히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 같지는 않다 ….


영화와 기억. 영화와 추억. 그리고 ‘테리’와 ‘재돌이’. 잔잔한 소품들과 피조물들이 한데 모여서 인생의 추억이 되고 그렇게 누군가의 인격을 만들어 나간다. 그래서 지금 지나가고 있는 이 찰나의 순간들이 다시는 오지 않을, 아주 귀중한 것으로 느껴진다. 이 귀중한 것들은 사치에 가까운 교양 덩어리 이기도 하다. 무엇을 보느냐 무엇을 경험했느냐는 그 순간에는 아무 의미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흘러 돌아보면 눈물을 머금고 있는 동상처럼 내 뒤편에 서 있다. 지금 내가 약간의 우월감과 허영심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건 내가 그동안 무엇을 보고 살았는지에 대한 인생의 총체적인 감각 덕분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 감각은 지금도 내 안에 펄떡펄떡 살아 숨 쉬고 있다. 영화라는 건 내 안에 가장 귀중한 소품이다.




언젠가 거장 마틴 스콜세지는 이렇게 말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위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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