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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버닝」에 대한 짧은 에세이

by 심재훈



처음 이 영화를 접했을 때 리얼리즘이 강한 청춘 영화라는 인상이 강했다. 「밀양」을 처음 보았을 때 이게 무슨 영화인가 싶었다. 아마 그 당시에는 이런 영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 같다. 내 인생의 깊이가 영화의 깊이만큼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근에 「버닝」을 제대로 봤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는 것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영화는 강렬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리뷰를 쭉 훑어봤다. 많은 리뷰들이 계층 문제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 영화에는 계층 문제로 보이는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가 계층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 보잘것없는 인생을 사는 종수(유아인)와 상류층 젊은이 벤(스티브 연)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다. - 적어도 내 생각엔 그렇다. - 전혀 다른 종류의 삶을 살지만 그들은 적어도 인간이라는 존재라는 점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있다. 진짜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이해와 공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어나는 문제들이 그것이다. 이 영화는 이 설명할 수 없는 미스터리를 파헤치고 있는 것이다.


영화에는 ‘보일’이라는 고양이가 등장한다. 영화를 보면서 해미(전종서)의 진짜 정체가 고양이는 아닐까 생각해봤다. 그리고 나는 벤의 정체가 ‘영매’에 가까운 어떤 것이라고 생각했다. 벤은 해미를 ‘보일’로 바꾸어 놓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대부분의 리뷰와 영화 해석이 말하는 것들과 좀 다른 해석을 내 나름대로 생각해보았다. 혹시 벤은 종수를 도와주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벤은 종수의 무의식을 통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을까? 벤이 태워 버린 건 해미였고 종수는 해미를 무의식 상에 가장 가까운 존재로 여겼던 건 아닐까? 해미는 원래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영화는 종수의 무의식을 투사해서 보여준 건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게 정화(淨化)의 과정일지도 모른다. 벤은 해미라는 무의식을 지워버리고 종수에게 새로운 걸 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무의식은 수많은 미스터리를 주고받는다. 그리고 어느 날 ‘벤’ 같은 존재가 우리 앞에 떡하니 나타나는 것이다.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색채를 가지고 있는 존재. 인간성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 보이는 존재. 누구든지 그런 순간이 찾아온다. 아니, 오히려 그런 순간이 제 발로 찾아오길 마음으로 바란다. 인간은 언제나 이런 이색적인 존재를 갈망하기에 종교와 탐닉의 세계에 빠지기도 한다. 이것이 진짜 인생의 문제이며 가장 미스터리 한 문제이다. 그리고 난 가끔씩 ‘벤’을 마주하고 싶다. 인생에서 설명할 수 없는 미스터리를 ‘벤’에게 물어보고 싶다. 이렇게 따지자면 ‘종수’는 완전히 실패했다. 결국 ‘벤’을 칼로 찌르고 포르셰와 함께 태워버리기 때문이다. 무엇이 옳은지는 각자의 척도로 결정하지만 적어도 이런 시점에서도 영화를 해석할 수 있다고 본다. 믿어야 본전이라는 말이 있다. 설마 혹시 또 알겠는가? ‘벤’이 정말 나를 도와주기 위해 나타났다는 사실을. 나는 벤이 더 남성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종수는 여성스럽게 느껴졌다. 원래 진심으로 나를 도와주려는 존재는 처음부터 모든 걸 내어주지 않는다. 그들은 아주 차갑고 신비스럽게 등장한다. 적어도 우리 눈높이에 맞게 나타난다. 처음부터 한 가지씩 차근차근 알려준다. 이런 점에서 영화에서 종수는 미스터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낯선 존재라는 이유 때문에 그 미스터리를 걷어찬다. 낯설다는 이유로 미스터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 이거야말로 가장 큰 비극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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