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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 클럽

< Jazz Club; 음악과 재능을 사랑함에 있어서 >

by 심재훈

밤은 추워졌다. 그리고 몸은 약해졌다. 커피 잔을 들어 올릴 때 손이 미세하게 떨린다. 어느 순간부터 수전증이 생겨버렸다. 나는 재즈클럽을 추억한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나는 외딴 실패자인가? 잔인해지기 위해서 내 몸을 불사르는게 맞는 건가? 그런데 다른 사람이 나를 생각하는 것처럼 나는 낭만주의자는 아니다. 그저 글과 음악, 영화와 연극을 좋아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시인 바이런처럼 여성편력을 가득 채우고 싶은 욕망은 없다. 물론 나에게도 그런 욕망이 있다. 그러나 솔직히 그런 욕망은 그리 크지 않다. 먹을 것과 입을 것, 그런 것들이 충분하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보통 작가란 그런 소시민적 삶을 추구한다.


그러니까 재능이 있다는 것은 여러모로 여러 가지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부족한 나의 인생을 돌아보아도 모순은 그대로 남아있다. 그 모순이란 여러 가지로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기묘하면서도 나의 문학적인 설명으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아주 부끄러운 얘기이지만 나는 그 모순에 항복하고 말았다. 내 몸이 나의 명령을 제대로 따라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이 모순을 정말로 증오했고 나의 절대적인 수치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마음은 크게 변화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래도 이 모순을 품고 살아가는데 예전처럼 큰 압박을 느끼지는 않는다. 나는 이제 여유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빨간 고물 자전거가 카페 바깥에 세워져 있다. 밖은 세찬 바람이 분다. 하늘은 푸르면서도 약간 어둡다. 약간의 시적 허용을 해보자. 앞 테이블의 두 중년 여성분들은 성당 얘기를 하고 있다. 누군가가 세례를 받는가 보다. - 세상은 평온할 수 없는 것일까? 그때 나는 스스로 이 질문을 계속 던지고 있었다.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이 떠올랐는지 몰랐다. ‘나’라는 자아와 세상은 서로 너무 다르기 때문에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먹고 살기 어렵다는 현실과는 하등 상관없는 질문들. - 카페에는 재즈 음악이 풍겨 흐른다. 나는 예전에 재즈 클럽에 한 번 가보았다. 서울 성수동에는 그런 카페들이 꽤 많다. 체격이 꽤 큰 한 여성이 재즈 음악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솔직히 그녀의 큰 체격 탓인지 그때 나는 그 멜로디에 흠뻑 취하지는 못했다. 그 여성 보컬의 피지컬에 약간 위압감을 느끼기까지 했다. 그래서 재즈 악기들(첼로 베이스와 드럼)의 소리에 집중했다. 확실한 건 나는 태생적으로 재즈 타입은 아니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이유는 모르겠다. - 나는 1년 전쯤에 이 짧은 글을 써놓고 지금 다시 읽어보고 있다. 신기한 건 지금 나는 재즈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왜 이렇게 갑자기 변한 걸까?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읽으면서 본격적으로 재즈에 입문했다. 참 아이러니하다. 아직 초보이긴 하지만. 어쨌든 바깥에서 보는 것과 직접 속으로 들어가 오감으로 느끼는 것 사이엔 엄청난 간극이 있나 보다. 확실한 건 나 스스로 하루키라는 거장의 그늘 막에 들어가고자 재즈 듣기로 마음먹은 건 아니라는 거다. 난 그냥 어떤 고유성을 가진 무언가를 좋아한다. 그 무언가를 알고 소유하는 만족감이 나에겐 인생의 중요한 우선순위 중 하나다. 어느 순간 시험 삼아 찰리 파커와 쳇 베이커를 유튜브로 들었다. 너무 좋았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제는 재즈가 이렇게 좋은 것인지 일찍 알지 못했던 걸 오히려 후회한다. - 나는 클래식과 대중가요를 더 좋아한다. 그렇다고 재즈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 (이 얘기도 이제 과거가 되었다. 지금 나는 재즈를 많이 좋아한다. 스탄 게츠의 「Move」를 듣고 있으면 절로 흥이 난다. 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건 역시 테디 윌슨의 피아노다. 당장이라도 「블루스 인 씨 샵 마이너」를 틀고 싶다.) 가끔씩 재즈를 듣는다. 클래식은 나의 고풍스러움을 증진시키고 가요는 나로 하여금 사람들의 인기를 얻게 해 준다. 사람들은 나의 목소리 톤 tone을 좋아해 준다. 음악을 공부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한 가지 개인적인 의견을 덧붙이고 싶다. 음악의 길은 천차만별이라고 생각한다. 훌륭한 고음이 있다면 박수받을만하지만 그것이 음악의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음악에서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곡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느냐에 관한 것이다. 곡의 키 Key가 자신에게 너무 높다면 낮추면 될 일이다. 그러나 곡의 감정과 성격을 이해하지는 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높은음을 낼 수 있다고 해도 절대 실력 있는 가수가 될 수 없다.


그래서 클래식은 영감을 제공하고 가요는 감정을 표출한다. 아마 재즈는 이 중간 즈음에 위치하지 않을까. 어떤 사람들은 클래식처럼 추상적인 음악은 쓸데없다고 말한다. - 재즈도 클래식만큼 추상적이지만 아무 쓸데없다고 누가 말할 수 있으랴 - 그러나 그렇지 않다.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사랑이 전제되어 있어야만 조밀하고 구체적인 육체의 사랑이 존재할 수 있다. 그러니 너무 조급해하지 말자. 음악은 우리와 함께 있고 언제나 해석이 가능하다. 사랑에 대한 어떤 대략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을 때에 비로소 그 디테일한 파편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전체적인 숲을 볼 때 나무가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것처럼. 내 앞에 있는 사람의 대략적인 성향을 알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사람의 사소한 행위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사랑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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