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문화의 뿌리를 찾아서
* 이 글은 2020년 2월에 런던을 여행하고 나서 쓴 수필입니다.
가치와 사상, 이와 같은 추상적인 척도들이 영국인들의 심장엔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들은 문화가 곧 품격이라는 사실을 가슴 깊이 새기고 살아간다. 웨스트 민스트 사원은 이러한 영국인의 잣대를 잘 대변하고 있다. 사원은 국가와 지역에 헌신했다고 평가받는 위인들의 무덤을 잘 보관하고 있다. 나는 사원을 구경하며 일제 식민지 기간 동안에 희생한 우리 독립투사들이 이만큼 조명받고 있는지 생각해봤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인물들을 위한 공간이 좀 더 확충되어 우리가 어떤 선진들의 후 세대임을 알고, 정체성도 올바르게 확립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면 어떨까.
문화의 유산을 보존하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그것이 유형문화이든 무형문화이든지 상관없다. 각 나라의 문화는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문화의 고유성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문화의 고유성이란 각 지역의 환경과 언어 등과 같이 토속적이고 전통적인 것들을 말한다. 문화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람의 생각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가꾸고 개발해야 할 필요가 있다.
초등교육을 받아오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가장 먼저 ‘한국’ 사람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한국’이 세계 속에 어디에 위치해 있고, 어떠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 배운다. 그리고 나는 ‘한국’ 사람으로서 어떤 문화를 소유한 사람인지 곱씹어본다. 한국문화의 대표적인 상징은 ‘효(孝)’라고 말할 수 있다. 상이 났을 때에 3일장, 7일장은 물론 고려·조선시대에는 몇 년간 부모의 무덤을 지키기도 했다. 제사와 의식은 한국의 문화를 보여주는 커다란 매개물이다.
그렇다면 ‘효(孝)’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문화생활의 일부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오히려 ‘효(孝)’란 사람과 사람 사이의 태도·정신적인 양식(형식)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효(孝)’는 문화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효(孝)는 문화의 양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진정한 문화는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나는 이 질문에 대해 평소에 깊이 고민해왔다. 내 개인적인 의견이 무조건 옳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한국 문화의 본질은 ‘단군신화’에 있다고 본다. 최근 한국의 교육시스템은 단군신화에 대한 언급을 줄이려는 것 같다. 일각에서는 단군신화를 폐기하자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다. 동물이 식이요법을 통해 인간으로 변화하여 건국의 기초를 세웠다는 하나의 신화가 허망하고 하찮게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동아시아의 한자 문화권 속에서 한국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무엇일까 고민해본다면 막상 생각처럼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다.
한복과 김치, 한글, K-POP 문화는 세계적으로 새롭게 부각받고 있다. 매우 긍정적인 현상이지만 앞으로 한류문화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받기 위해서는 한국의 ‘뿌리’가 무엇인지 자각하는 게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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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지금 개개의 국가·민족의 뿌리를 회복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보호무역주의가 성행하기 시작하고 나라 사이에 벽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영국의 스코틀랜드 독립 문제가 계속해서 대두되고 있고, 브렉시트(Brexit)와 함께 스페인 카탈루냐 독립 문제는 더 심화되고 있다. 일국양제를 기치로 중국은 홀로서기에 돌입한 대만과 계속 싸우고 있다.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의 간섭은 이미 고질적인 문제가 되어버렸다. 트럼프 대통령은 ‘아메리칸 퍼스트(American First)' 어젠다를 통해 그동안 국제사회가 쌓아왔던 신뢰관계에 큰 균열을 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모든 분리주의 운동들을 곱지 않은 시각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런 분리주의 운동도 나름대로 이점이 있다. 어떻게 보면 많은 사람들이 자국 문화를 예전보다 소중하게 여기기 시작했다는 걸 암시하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사람들은 개인과 민족, 국가의 ‘뿌리’ 찾기 운동에 돌입했다. 나 자신과 이웃, 지역과 국가의 뿌리가 무엇인지 의문을 갖기 시작했고, 자신의 정체성을 새로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면에서 ‘문화’란 너무나도 중요하다. 자신이 속한 민족과 국가의 문화를 잘 정의할 수 있다면, 지역의 정치적 갈등과 혼란도 자연스레 줄어들 것이다.
이러한 고민들과 함께 나는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같이 한국에도 단군신화 역사관 또는 박물관이 하나쯤 있으면 어떨까라는 생각해보았다. 단군신화가 사실이 아닌 허망한 이야기일지라도 신화가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신화가 있다면 사람들은 적어도 특정 문화의 뿌리를 인식하며 살아갈 수 있다. 곰이 쑥과 마늘을 먹고 여자로 변신하는 이야기는 생각보다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가져다준다. 학생들은 단군신화를 배우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변신의 한 장면을 상상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인내를 감내한 변신 이야기의 한 장면은 다층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어떤 사람은 ‘곰이 끊임없이 인내하여 변신에 성공했다’라는 점을 통해서 ‘인내’의 중요성을 자각하게 된다. 세계적으로 한국 사람들은 근면 성실하고 똑똑한 민족으로 평가받고 있는 게 그리 이상하지 않은 이유다. 또 쑥과 마늘이라는 음식에 집중하여서 한국의 각종 채소와 나물의 효능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한다. 신화의 한 장면은 셀 수 없는 해석과 상상의 재료로 작용할 수 있으며 이것은 곧 우리의 삶의 태도와 양식을 좌우하는 하나의 요소가 된다. 이런 점에서 우리도 한국의 문화를 깊이 생각해보고 우리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한 번쯤은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