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정. 폭발성. 일탈 >
김옥빈이 나오는 영화들은 많이 봤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박찬욱 감독의 「박쥐」(2009)이다. 박찬욱 감독이 정말 캐스팅을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기력증에서 둘러싸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여자. 그 특유의 칙칙함과 이끼 냄새가 배어 나오는 얼굴. 김옥빈은 이 영화에서 엄청난 연기를 펼친다. 이 영화엔 설명할 수 없는 공포가 있다. 마치 그 무기력증이 세상에서 가장 당연한 거라고 말하는 것 같다.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소설 『어셔 가의 몰락』에 나오는 두 신경질적 환자 남매처럼 태주(김옥빈)도 그렇게 특유의 어둠을 유산으로 갖고 태어난 것 같다. 태주에게 상현(송강호, 신부 역)은 세상에 유일한 희망이다. 그는 구원자다. 나에게는 그런 태주가 애써 가엾게 느껴졌다.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태주는 아예 다른 존재가 됨으로써 인생의 새로운 희망을 찾는다.
김옥빈은 배우로서 심각한 유리성(vulnerability)과 화산 같은 폭발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녀의 연기는 어느 순간 너무 소름 끼치게 무섭기도 하지만 영원히 안아줘야 할 것 같은 동정심이 든다. 그녀의 얼굴은 세상이 이렇게 뿐이 돌아갈 수 없는 이유를 말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 그녀에겐 이런 말들이 잘 어울린다.
「악녀」(2017)에서의 액션 연기는 일품이었다. 중간중간 정말 멋있는 액션들이 있다. 스토리는 조금 떨어지지만 이런 액션이라면 좋은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오토바이 씬 같은 액션은 「존 윅」을 조금 닮아있기도 하다. 나도 태주처럼 가끔씩은 어디론가 튕겨져 버리고 싶다. 어떤 다른 존재가 되어 다른 방식으로 살아본다면 그건 어떤 느낌일까. 인간에게 일탈이 꼭 필요한 이유이다. 우리는 항상 착할 수 없다. 옳을 수 없다. 어쩌면 우리의 본질은 우리가 생각한 것과는 완전 다른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