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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일기」의 추억

by 심재훈

어렸을 때 「남극일기」(2005)를 본 게 기억난다. 그리고 요새 이 영화가 다시 재조명을 받는 것 같다. 다시 생각해보니 이 영화가 참 대단한 영화였다는 생각이 든다. 개봉되었을 당시에는 많은 주목을 받지 못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 영화계에서 이런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는 거의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 이 영화는 주인공의 심리묘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우리는 아직까지 이런 영화에 익숙하지 않은 것 같다. 재미가 없을뿐더러 영화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알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 영화에 좀 더 오락적인 요소들이 첨가되었다면 더 흥행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 영화가 굉장한 ‘웰 메이드’ 영화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다른 사람들과 달리 나는 이 영화를 재밌게 봤던 것 같다. 누군가에겐 분명 이 영화가 신선하고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모든 예술 작품들은 대중성과 예술성을 함께 추구한다. 너무 추상적이거나 예술성에 치우치게 되면 사람들의 관심을 얻기 어렵다. 어느 정도의 대중성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예술은 살아남을 수 없다. 반대로 대중의 시선에만 신경 쓰게 되면 작품은 생명력을 잃는다.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바를 이룰 수 없다. 만약 그런 예술가가 있다면 일시적인 스포트라이트는 받을지 모르나 지속적인 활동을 보장하기 어려울 것이다. 정작 관객들이 보고 싶은 건 그 창작자만이 갖고 있는 고유함(originality)이기 때문이다. 오락적인 요소들은 단순히 창작자의 그런 의도를 관객들에게 잘 실어 나르는 역할을 한다.

「남극일기」도 처음서부터 끝까지 재미없다고 생각하고 보면 정말 못 만든 영화가 될 것이다. 그러나 영화가 담고 있는 본질과 예술성을 천천히 생각해본다면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영화에는 오락과 선정적이면서 자극적인 요소들이 유난히 많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나라의 급진적인 산업 성장 과정을 반영한 것일지도 모른다. 밀레니엄 시대에 들어오면서 급진적인 경제성장을 경험했고 우리는 뭐든지 열심히 일했고 빠르게 처리해왔다. 우리는 사물을 느긋하게 보지 않는다. 이런 우리의 마음이 영화를 볼 때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에 좋은 영화는 느리게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느긋하게 천천히 봐야 한다, 그래야만 영화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상업영화라고 통칭하는 것들이 보통은 우리의 구미를 당기는 오락적이고 자극적인 영화일 때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원래 예술은 누군가에게 어떤 의미를 전달해주기 위함 아니었는가? 자기 자신을 정의하고 나름의 기준을 갖고 세상을 정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원래 예술의 순 기능 아니었는가? 만약 그렇다면 예술이 왜 철학적일 수는 없을까? 우리는 이것에 대해 충분히 고민해봐야 한다. 보는 재미가 있는 만큼 생각하고 철학하는 재미도 있다.

이런 면에서 「남극일기」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갖고 있는 원초적인 고독감을 정말 잘 표현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성취욕에 중독된 한 사람이 주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런 지독함이 관객인 내 안에도 열실이 살아있다는 걸 깨달을 때 말할 수 없는 먹먹함이 밀려온다. 그건 하나의 거울처럼 나를 비추고 있었다. 이게 영화를 보는 진정한 묘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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