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oaquin Phoenix ; 자기파괴. 방랑자. 조커 >
그의 긴 생머리는 어느 순간부터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글레디에이터」에서 호아킨은 아직 어리숙하고 덜 떨어진 캐릭터에 잘 어울려 보였다. 사람들은 「조커」로 호아킨이 희대의 배우로 급부상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이런 자기 파괴적인 면모는 갑자기 생긴 게 절대 아니다. 세계에서 자기 파괴적인 연기를 가장 잘하는 배우를 꼽으라면 단연 호아킨 피닉스일 것이다. 퇴폐적인 미가 얼굴에 묻어난다. 호아킨에겐 선천적으로 ‘방랑자’ 이미지가 있어 보인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처럼 이 세계를 전전긍긍 돌아다니는 것처럼 보인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처럼 세상을 엿보지만 어디에도 온전히 정착할 수 없는 유목민, 떠돌이 인생처럼 느껴진다.
이런 그의 방랑자적 캐릭터가 가장 잘 드러난 게 「마스터」(2012) 아닌가 싶다. 이 영화는 처음 볼 때는 쉬워 보여도 이해하기 꽤 어려운 영화라고 생각한다. 프레디 퀼(호아킨)은 사이비 종교 교주, 랭케스터(세이모어 호프만)를 만나 그의 신념에 안착하게 된다. 하지만 그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곧이어 퀼은 다시 떠돌이 인생을 선택한다. 어떤 종교와 신념에도 구속되지 않겠다는 그의 행보가 영화에선 클라이맥스로 장식된다. 겉으로는 교주 랭케스터가 성공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모든 것에서부터 자유로워진 퀼은 우리에게 인생의 또 다른 교훈을 남긴다.
어떻게 보면 나는 퀼의 선택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매일 착각하고 살아간다. 우리는 자신이 스스로 우리의 인생을 조정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끊임없이 어딘가에 구속되어 있다. 그리고 자유라는 가장 중요한 가치를 놓치며 살아가는 거다. 우리는 사회와 국가의 요구에 묶여 있으며, 돈과 직장이라는 환경에 묶여 산다. 그렇다면 이것이 최선의 삶일까? 우리는 한 번 생각해봐야 한다. 성숙한 사람일수록 어딘가로부터 더 멀어진 삶을 살아가기 마련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특정 종교와 철학에 심취한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자유로워지는가? 그렇지 않다. 그 신념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의 영혼을 더 자유롭게 할 수 없다면 그 모든 노력들이 헛수고로 남을지도 모른다. 나는 「마스터」를 보면서 모든 종교인들에게 경고하고 싶었다. 무언가를 진짜로 믿는 사람일수록 말수가 적어지는 법이다. 그런 사람은 세상의 모든 현상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침묵만이 그 신념이 진리에 가깝다는 걸 증명해준다. 시간이 지나 돌아보니 영화 속 프레디 퀼에게 더 공감이 간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2017)에서도 조커와 비슷한 연기를 보여준다. 여기서 그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산다. 그리고 옷장에 숨어 얼굴에 비닐을 뒤집어쓰고 괴로워한다. 그 장면은 너무 고통스러워 보여서 지켜보는 나도 너무 괴로웠었다.
「조커」는 지금까지도 여러 해석들이 난무하다. 영화가 꿈과 현실이 복잡하게 얽혀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 시각에서 보니 영화가 더 재밌게 보인다. 우리는 이제 정신의학이 팽배한 시대에 살고 있다. 어쩌면 암은 정복될지 모르지만 새로운 정신병들은 앞으로도 더 많이 창궐할 것 같은 예감이다. 요즘 범죄에 관한 TV 프로그램이 많이 생기는 이유도 이런 탓이다. 조현병, 편집증, 사이코패스 같은 단어들이 미디어에 매일매일 등장하는 걸 보면 우리 사회의 어딘가가 과포화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는 걸 암시한다. 기득권이 모든 걸 지배하는 세상. 그리고 젊은이들이 더 이상 진출할 가회가 없는 사회. 젊은이들은 이런 사회에 고통받고 있다. 머릿속은 더 복잡해지고 정신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런 사회가 또 다른 ‘조커’의 등장을 예고하는 건 아닐까? 그래서 이 영화가 더 시의적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