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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재훈 Jun 27. 2021

에코와 사강의 연인 - 1

연인, 주연이를 향한 사랑의 편지

 그것들이 내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한다는 건 대체될 수 없는 것들을 품는 것이고 우리에겐 그것들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인연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신비와 우연을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직도 그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건 그 얼굴만이 갖을 수 있는 어여쁨과 조숙함 때문이다. 원초적인 의미로의 예쁨. 그리고 공주. 아직 여성으로 나타나는 성징이 없더라도 그 예쁨은 원래 거기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그녀를 왜 사랑하냐고. 그렇게 오랫동안 한 여자만 사랑하면 질리지 않냐고. 사랑은 현실이다. 사랑은 헛되다. 사랑은 전쟁이다. 이런 모든 말이 떠돌 때에 가장 외로웠을 때를 떠올려본다. 베르테르는 왜 그렇게 슬퍼했을까. 그리고 왜 마음의 병을 얻었을까. 생각해보면 거기엔 정답이 없다. 그의 마음이 거기로 끌렸기 때문이다. 


 풋풋한 얼굴은 가슴에 상처를 남기고. 아주 담담하고 추상적인 고백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건 하나의 시 같아서 가슴에 제대로 닿는건지 알 수 없다. 나와 주연이는 하나의 긴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장대한 서사시. 제대로 써내려가고 있는 건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짙은 눈썹과 뚜렷한 이목구비, 긴 곱슬머리는 언제 보아도 따스하고 갓 태어난 망아지 같다. 그렇다. 나는 주연이가 너무 예뻐서, 그 고운 얼굴이 그녀의 영혼과 많이 닮아있을 거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그래서 그녀가 순전한 여자임을 스스로 확신했다. 사랑을 억지로 예찬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나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는 건 어쩌면 한 사람의 존재, 그 자체로 충분하고 예쁠 수 밖에 없는 존재, 그녀라는 유일한 존재에서부터 시작할런지도 모른다. 나는 미술을 한다. 데생을 그린다. 화가가 되고 싶다. 심심할 때면 아름다움이 도대체 뭘까 곰곰이 생각해본다. 아름답다라는 것. 그건 여자를 말하는 걸까. 아니면 여자가 갖고 있는 여성성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언젠가 움베르트 에코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조금 깨닫은 적이 있다. 정말 아름답다라는 것. 그건 어떤 위상을 관찰하는 게 아닐까 상상해봤다. 아름다운 존재는 원래부터 아름답지 않았을까. 그것이 아름답게 태어났기 때문에 아름다운 거다. 신성하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그에 버금가는, 이제 곧 입을 벌리려 하는 꽃봉오리처럼, 스무 살 처녀의 미모가 절정에 다다르듯이, 사람들은 그 높이 솟아있는 위상을 바라보며 엄지를 치켜세우는 거다.

 

 왜 이리 감성적으로 변하는 것일까. 가끔씩 온화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날카롭고 질투에 불타는 사람이 되고 싶다. 주연이를 그렇게 사랑하고 싶다. 메리 올리버의 시를 참 좋아하지만 인생에 한 번쯤은 바이런 같은 남자가 되고 싶다. 난 풋풋하 사랑을 잃어버렸다. 서른 줄에 들어갔고 이제는 질펀하게 끈적끈적한 존재가 되어간다.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는 징조이다. 그러나 아직도 사랑을 할 때면 가슴이 턱턱 막히고 숨이 달린다. 아직도 설레는 거다. 어렸을 적 청바지에 청자켓을 입었던 풋풋함. 다시 그 세계로 깊이 들어가고 싶다. 그때 주연이는 나를 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첫사랑의 향기에 잠잠이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가라앉았다. 우리가 첫 위기를 맞았던 건 몸이 오르고 변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서로가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을 즈음에 찾아오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우리 사이를 어색하게 만들었다. 한동안 우리는 서로에게 가까이 갈 수 없었다. 그 엄연한 현실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다른 쪽에서 볼 수 있도록 이끌었다. 난 그때쯤 사강의 소설들을 탐닉했다. 소설이 담고 있는 아름다움. 주인공 시릴의 세계관이 왠지 모르게 멋져 보였다. 물론 그 사랑법을 닮고 싶었던 건 아니다. 만약 천국이란 게 정말 존재한다면 사랑을 시작할 때에 그 설렘이 영원이 지속되지 않을까 마음대로 가정해보았다. 프랑스 여류작가의 글은 단순히 섹슈얼한 오감을 일깨우는데 그치지 않았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남는 건 이상향에 대한 소망과 동경 같은 거였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 난 그게 부러웠다. 모든 것이 가능한 파라다이스. 성적인 재미는 그 세계의 한 단면에 불과했다. 


 내가 아직도 주연이를 사랑하는 건 그녀가 아직도 너무 예쁘기 때문이다. 먼 훗날 만약 그 예쁜 얼굴이 점점 사라진다면 그때도 그녀를 변함없이 사랑할 수 있을까. 이것도 잘 모르겠다. 내가 가지고 있는 건 풋풋한 얼굴, 그 기억, 그것에 대한 이미지와 잔상 뿐이다. 만약 내가 그것을 상상할 수 없다면 그때 아무 후회없이 떠날 수 있지 않을까.  



* 이 작품은 2021 박경리 토지문화재단 문인창작실 입주작가로 선정되어 활동하는 동안 집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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