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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재훈 Jun 29. 2021

에코와 사강의 연인 - 2

사강의 시간과 서재

그래서 결국 내게 남은 건 한 줌의 흙 뿐이었다. 장작은 뜨겁게 타고 있다. 가끔씩 탁탁하고 튀는 새끼 불꽃들이 공기를 만나면서 손가락으로 옮겨붙는 것 같다. 사강은 그렇게 의자에 앉아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누워있다. 제인 오스틴의 책을 한 장씩 넘기며 얼굴엔 조그마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아주 한량한 낮이다. 아무 손님도 찾아오지 않을 것 같지만 몇 시간 후면 유명인사 몇 명이 방문하기로 했다. 검파란 털의 러시안 블루가 카우치 한 가운데 엎드려 있다. 우리 블루도 그 지루한 시간성을 견디지 못하고 슬며시 졸기 시작한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건 시간을 길게 늘어뜨리는 행위와 비슷하다. 그 사이엔 자유와 생령이 숨 쉰다. 사강은 그 기다란 숨을 들이키고 그것을 다시 책장 한 가운데로 뱉는다. 글을 쓴다는 건 이 한가운데 숨어 있는 자유를 훔쳐오는, 그런 것이다. 단지 그 자유를 활자로 표현해내는 것뿐이다.


그 자유 안에는 수많은 문학 생령들이 존재한다. 사강은 책을 들때마다 그들과 이야기한다. 그런 쾌락이 때로는 섹스보다 더 좋게 느껴진다. 이 수많은 기다림. 그리고 그들의 염원. 문학이란, 또 글을 쓴다는 건, 이렇게 보이지 않는 존재들과의 만남과 같고 그 양립할 수 없는 것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마찰음을 비추는 거울과 같다. 창밖으론 아주 무력하게 볕을 받고 있는 초록색 애스턴 마틴이 보인다. 비대한 몸통에 비해 공룡의 손처럼 튀어나온 귀가 애처로워 보인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을까.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나는 아직도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카트린느 드뇌브와 입생 로랑. 세상에서 한 솥밥을 먹지만 이들을 만나는 건 또 다른 기쁨을 가져다준다. 새로운 가치관과 세계. 그들의 세계가 이 아늑한 집에 들어와 누군가의 문을 두드리고 나는 보란듯이 그 뜻밖의 손님을 받아들인다. 나와 그들의 세계가 서로 짖이겨지고 독특한 결합을 이루어 내면서 루이보스처럼 오래된 목재건물에서나 나올법한 지긋하고 향긋한 냄새를 뿜기 시작한다. 기어코 그들이 문을 열고 들어올 땐 내 세계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새로운 우주. 그 신선한 파동만이 이 집 안에 가득찬다. 내 세계는 오직 나 홀로 남아있을 때에 존재한다.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그 기다림의 시간동안 홀로 자유를 누린다. 심심할 때면 펜을 끄적인다. 악마 같은 게 나를 붙잡아서 심상이 곧 형체를 가질 수 있도록 내 손을 움직인다. 문화의 향수. 세상엔 무수한 사상들이 있어서 때로는 나 혼자 그걸 느끼도록 하고 그것도 안된다면 다른 손님을 붙여서 그 보이지 않는 완력을 내게 행사한다. 난 정말 우주 한가운데 서 있는 것 같다. 중력을 단 목성처럼 끌어당긴다.


사람들은 점점 고급스런 절충주의자가 된다. 평등과 민주주의. 그러나 내 세계는 한 마리의 독단자가 모든 것을 다스리는, 잔인한 군국주의와 비슷하다. 모든 걸 삼키고, 모든 걸 다스리고, 모든 게 자기소유인냥 한 몸처럼 움직인다. 내 세계의 주인은 나일 뿐이다. 아니, 나밖에 없다. 이 텅 빈 거실과 평화로운 불꽃, 그리고 나의 육체는 태양계의 중심이 되어 모든 걸 끌어당긴다. 사람들은 나를 기다린다. 적막에 휩싸일 때면 찾아오는 손님들. 그래서 난 지루할 틈이 없다. 블루가 밖에 어떤 낌새를 알아차렸는지 잠잠했던 고개를 든다. 책장은 멈추지 않고 계속 넘어간다. 의자가 미세하기 들썩인다. 이 끝없는 고요함. 이 우주는 어디까지 이어질까. 푸르른 자연과 어우러진 낯선 소음. 무해라고 믿었던 이 공간 속에서도 원래 거기 있었을만한, 자연이라고 통칭할 수 있는 사운드가 여전히 살아 움직이고 있다. 아마 낮에 우는 소쩍새와 닭소리일 것이다. 그것들이 나를 거기로 초대한다. 난 원래부터 이런 사람이다. 사강. 아침부터 땀을 흘리는 족속들과는 전혀 다른 사강. 어떤 기운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는 사강. 그것은 내 생체리듬 같은 것이다. 매우 센시티브하고 조그마한 움직임에도 까다로운 그런 사강. 나는 이렇게 움직인다. 사강. 고마워, 사강. 중세시대처럼 고즈넉하고 이제 끝이 보일 것 같은데도 곧바로 새로운 실끈이 붙고야마는 그런 연속성. 영매처럼 이미지가 보이면 적어야 하고 멈춰야 할 때에는 멈추는 사람. 사강은 그런 일련의 세계 가운데서 살아간다. 하나의 예술세계가 보인다. 예술은 내 마음의 우주. 이제 손님이 왔나보다. 그들을 맞으러 나가야겠다.



* 이 작품은 2021 박경리 토지문화재단 문인창작실 입주작가로 선정되어 활동하는 동안 집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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