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는 곧 과거가 되고, 미래는 곧 현재가 된다

by 베리피아 다이어리

나의 새 사수 L이 입사했다.


나보다 두 살 많았지만, 앳된 얼굴에 키도 작아 귀여운 인상이었다.

그런데 일찍 결혼해 벌써 아이까지 있었다.


중소기업 출신이었던 L은, 그곳에서 브랜드 전체를 총괄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대기업으로 오면서 맡는 일은 한 파트, 직급도 과장이었다.


L과는 금세 가까워졌다.

낯선 조직에 막 들어온 L에게 나는 살갑게 다가갔고, 가끔 술잔을 기울이는 사이가 됐다.
L에게 어쩌다 우리 회사에 들어오게 됐냐고 물어보니


큰 기업의 잘 나가는 브랜드는
어떻게 브랜드를 전개하고
비즈니스를 하는지 궁금했어.


전에 회사에서 L은 인정받는 인재였다.

전 회사 사장은 L의 이직을 극구 말렸고,

"언제든 돌아오면 받아주겠다"고까지 했다.


그는 우리 브랜드에 와서도 짧은 시간 내에

부장님과 부사장님께도 인정받았다.


L은 귀여운 인상과 달리 성격은 화통했고, 욕도 잘하며, 리더십이 있었다.

무엇보다 영업적인 감각도 뛰어나, 상품팀과 영업팀 사이에서 소통도 잘했고

내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밀어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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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의 시야는 넓었다.

단일 상품의 성공이 아니라, 브랜드 전체의 방향을 고민했다.

가끔씩 임원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어떤 방향으로 갈지에 대해

생각지 못한 질문과 의문을 제기해 당황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였다.


작은 회사에서 총괄을 하다 온 덕분인지,

L은 늘 'CEO의 시선'으로 회사를 어떻게 이끌어 갈지에 대해

고민하고 상품을 기획했다.

함께 일하던 MD들은 주어진 파트 안에서 전문성을 발휘하고,

상품을 어떻게 잘 만들지 고민했지만

회사 전체를 생각하는 느낌은 아니었다.(나도 그랬다)


회사의 몸집이 커질수록,

직원 수가 많아질수록

이런 부분은 윗선에서 결정하고

이끌어가는 구조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충돌의 시작


그런 L에게 천적이 있었으니,
새로 들어온 영업팀의 J차장이었다.


J차장은 들어오자마자 영업팀 분위기를 바꿔놓았다.
J의 무기는 데이터였다.


어쨌든 영업팀은 숫자로 이야기해야 되기 때문에

잘 팔리는 제품이 중요하고 숫자를 근거로, 현재 잘 팔리는 제품만 고집했다.


당시 내가 기획했던 상품이 여전히 매출을 이끌고 있었고

그 파생 제품들이 꾸준히 서브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L과 나는 그 트렌드가 이제는 꺾일 것이라 예측하고,

다음 시즌의 대안을 준비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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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평회에서 L은 미래를 위한 새로운 제품에 대한 이야기를 목청 높여 이야기했지만

J는 매출 그래프를 들이밀며 말했다.


이 매출을 그 제품으로 커버할 수 있겠습니까?


미래에 대한 확신은 무모한 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MD는 트렌드와 시장 흐름, 라이프스타일,

국내외에 대한 여러 가지 상황까지 종합 분석해서 기획안에 담아야 한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어떤 시즌에 세계적으로 조류 독감이 크게 유행했다.

한 MD가 이 내용을 알고 오리털과 구스털을 빨리 매입해야 한다고 했다.

겨울 시즌 제품으로 다운파카에 들어가는 소재이기 때문에

조류독감으로 자재값이 올라 소비자가까지 올려야 되는 상황이 될 것이기에

미리 확보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MD는 이런 내용까지 민감해져 있어야 했다.


이런 여러 가지 상황을 반영한 기획안임에도

L의 주장은 영업팀 눈엔 ‘뜬구름’처럼 보였을 것이다.


반대로 J차장의 데이터는 명확하고 현재를 보장했다.

당시 회사 시스템은 영업팀이 예산을 움직였고 그에 따른 물량 결정권을 쥐고 있었다.
결국 J의 말대로, 잘 팔리고 있던 스타일의 제품에 물량이 대거 투입됐다.


이탈


이 사건은 L에겐 큰 타격이었다.

브랜드의 미래를 설계하며 일해 온 L이었지만,

현실은 ‘과거의 성공’을 팔아먹는 구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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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의 경직된 시스템에 대한 회의가 쌓여가던 L에게, 이번 사건은 결정적이었다.


밖에서 볼 땐 멋진 브랜드였는데...
안에 들어와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네.

한 달 뒤, L은 결국 퇴사를 결심했다.
그리고 전 직장으로 돌아갔다. 입사한 지 1년도 안 된 시점이었다.


떠나는 날, L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넌 아이디어와 추진력이 있어.
분명 잘 해낼 거야.


L의 빈자리는 온전히 내 몫이 됐다.
하지만 나 역시 얼마 뒤 새로운 브랜드로 옮겼다.


그리고 1년 뒤, L과 J가 충돌했던 그 시즌의 제품이 시장에 나왔다.


전 동료에게 연락해 매출을 물었다.

"... 곤두박질치고 있어."


영업팀이 물량을 과하게 넣었던 그 제품의 판매는 곤두박질쳤고,

한 카테고리 매출이 통째로 추락했다.


판매가 잘된다고 비슷한 스타일의 제품이 너무 많았고,

물량 또한 너무 많이 넣은 탓에 다른 대안의 상품이 없어

매출은 곤두박질 칠 수 밖에 없었다.


L의 예측은 정확했고, 회사를 떠난 그의 결정 또한 대단했다.
L은 돌아간 브랜드에서 승승장구했고, 이른 나이에 이사 자리에 올랐다.


이 일은 나에게 분명한 교훈을 남겼다.
데이터는 현재를 말해주지만, 브랜드를 살리는 건 결국 ‘미래를 읽는 눈’이라는 것.
그리고 그 눈을 믿고 버틸 수 있는 용기, 그것이 진짜 브랜드를 움직이는 힘이라는 것을.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이 반도체에 올인 한다고 했을 때

얼마나 많은 이들이 말렸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그 뚝심있는 결정이

그가 이 세상이 없는 지금도 삼성을 먹여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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