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다른 골목, 다른 선택은 없었다. 이젠 해야만 했다.

by 베리피아 다이어리

오랜 시간 브랜드 회사에서 일하면서 느낀

고객에게 있어서의 브랜드의 의미는


브랜드=신뢰


고객이 특정 브랜드의 제품을 사는 건 어떤 믿음이 있어서이다.

그것이 제품의 퀄리티이든, 브랜드의 스토리이든 뭐든 말이다.


나 또한 한 사람의 고객으로서,

내가 결국 그 브랜드를 사는 이유는 믿기 때문이었다.


스타트업이 브랜드를 만든다는 건 쉽지 않은 이야기다.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서는 상품이 있어야 하고,

그 상품은 남의 제품을 소싱해 와서는 힘들었다.


자본금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만의 제품’을 만든다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다.

로고 하나 새기기 위해선 최소 수백만 원,

수량은 500 개부터였다.
그건 단순한 수량이 아니라 책임의 숫자였다.

그러나 “이걸 다 팔 수 있을까?”
그 현실적인 질문 앞에서 매번 손이 멈췄다.


남의 브랜드를 팔던 시절


나는 10년 넘게 들으면 알만한 브랜드 회사에서 일했다.
로고는 곧 신뢰였고 로고가 찍힌 티셔츠 하나,
로고가 새겨진 쇼핑백 하나에
사람들은 돈을 냈다.


하지만 이제, 내 앞에는
그 어떤 이름도, 신뢰도 없었다.


내가 가진 건
경험과 감각, 그리고 약간의 용기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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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제품을 소싱해서 가져와 팔았다.
좋은 제품을 찾기 위해 밤새 검색했고,
직접 써보고 검증한 후 판매를 진행했다.


그런데 우리가 잘 팔면,
곧 다른 누군가가 같은 제품을 팔기 시작했다.


가격은 내려가고, 우리의 자리는 점점 좁아졌다.
이 구조 안에서는 결코 ‘브랜드’가 될 수 없다는 걸
그때 절실히 깨달았다.


“이젠, 우리만의 것을 만들어야 한다.”


결심은 단순했다.
하지만 과정은 고통스러웠다.

우리가 팔아온 EVA 파우치 가방,
그 제품을 가지고 그동안 고객에게서 받았던

부정적인 피드백들을 보완하여 업그레이드하기로 했다.


고객들의 리뷰를 다시 한번 면밀히 찾아보았다.
그들의 말엔 늘 힌트가 있었다.


“크기가 너무 작아요.”

“손잡이가 너무 좁아요.”

“고리에 걸었을 때 중심이 안 맞아요.”


단점은 명확했고,
개선점은 분명했다.

그런데 막상 바꾸려니 쉬운 게 하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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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크게 하려고 하니 EVA 소재 특성상

가방 전체 두께가 두꺼워져 무게가 무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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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적정 크기가 어느 정도냐가 관건이었다.

기존의 귀여움에 실용성이 더 해진 세련됨으로 바꾸고 싶었다.


크기에 관련된 시뮬레이션을 수십 번 했다.
10cm 이상은 늘리면 절대 안 될 것 같았고
10cm 정도로 늘렸을 때는 장바구니 같았고

소재 특성상 제품이 너무 두꺼워질 것 같았다.


가로, 세로, 폭 5cm를 늘렸을 때 비로소
“이거다” 싶었다.


그 5cm는 숫자가 아니었다.
고객의 불편과 우리의 현실 사이,
가장 이상적인 타협이었다.


크기만 늘려서 되는 건 아니었다.

그외에 피드백을 포함하여

고객이 사용하기에 좀 더 도움이 될만한

요소들이 필요했다.


EVA소재는 특성상 물을 튕겨내지만

파우치의 지퍼는 일반 지퍼였다.

방수지퍼를 사용하고 싶었다.

물론 방수지퍼는 일반 지퍼에 비해

가격이 훨씬 비싼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수지퍼를 사용하고 싶었다.

기능을 좀 더 업그레이드 하기 위해선 필수였다.


그 외에 많은 부분들이 고려되어

최종적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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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디자이너가 아니었다.

아이디어는 머리에 가득했지만,
그걸 구현할 손이 없었다.


예전 회사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배는 내 얘기를 묵묵히 들은 뒤 말했다.

“네가 원하는 건 단순한 리뉴얼이 아니야,
EVA 소재 특성상 기술이 필요한 디자인이야.

나보다 더 잘 도와줄 사람을 소개해줄게.”


선배가 소개해준 선배의 선배는
자신의 스승이었던, L님이었다.


첫 디자인의 순간


샘플 제품을 들고 카페에서 L님을 만났다.
가방을 보여드리며
손으로 크기를 설명하고,
소재의 질감을 이야기했다.

나는 기획자의 언어로 말했고,
L님은 디자이너이자 기술적인 부분까지 꿰뚫어 보며

내가 생각지 못했던 것까지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선배의 말대로 EVA 소재는

단순히 디자인만 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기술적인 부분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되는 것이 확실했다.

그 부분까지 고려하지 않으면 실제 제품이 나왔을 때

문제가 많았을 것이다.


L님은 만난 건 정말 행운이었다.


좋아요, 한번 해볼게요.


그 말 한마디가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았다.

디자인이 유출되어서도 안되고

디자인만 예쁘게 나온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었기에

L님이 해보겠다고 했을 때 그 감사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일주일 뒤,
L님의 메일이 도착했다.

도면을 열었을 때 가슴이 뛰었다.


거기엔 숫자도, 선도, 각도도 있었지만
나에겐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건 내 '브랜드'의 첫 심장 박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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