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은행배 슈퍼매치 4강전 - 박정환 VS 신민준 (5)
"바둑 프로기사입니다."
내 소개를 할 때 이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날 보는 눈빛이 바뀌는 경험을 여러 번 해봤다. 어떤 프로기사는 군대에 있을 때 프로기사라고 밝히자 행정병을 권유받은 적도 있다고 한다. 아무래도 사람들에게는 [프로기사 = 머리 엄청 좋은 사람] 정도로 인식이 박혀있는 것 같다.
서울대병원에서 진행한 연구를 다룬 기사 제목에도 '바둑 두면 머리 좋아진다'를 떡하니 붙여놓은 것을 보면
[바둑을 둔다 -> 머리가 좋아진다 / 바둑을 잘 둔다 = 이미 머리가 좋다] 같은 식으로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다.
다만 사람의 지능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공부를 잘한다고 해서 주식이나 사회생활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 친구가 많다고 해서 반드시 부하직원을 잘 대한다고 볼 수는 없다. 자칫 '바둑만능론'에 빠졌다가는 환상이 깨지면서 도리어 바둑에 대해 실망할 위험이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점을 물어봐야 한다. 바둑을 두는 것은 어떤 쪽 머리를 키우는 것일까?
우선 해당 연구의 내용은 바둑 전문가 17명과 일반인 16명을 모집해 뇌의 활성화 정도를 비교해 보는 연구였다. 이 연구에 따르면 바둑 전문가들은 정서적 처리와 직관적 판단, 공간적 위치정보 등을 다루는 뇌 부위들이 더 활성화되어 있고, 해당 부위들이 더 잘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그렇게 뇌 기능이 강화되어 있기에 더 빠르고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이라고도 했다.
이걸 가지고는 실제로 뭐가 좋아진다는 건지 잘 와닿지 않는다. 실제로 바둑을 하면서 얻어지는 능력들 몇 가지를 살펴보자.
1. 책임감(+남 탓 감소)
바둑은 1:1 게임이며, 이기고 지는 모든 결과는 내가 한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 상대가 운 좋게 좋은 패를 쥐는 일도 없고, 실수했을 때 어떤 핑계도 댈 수 없다. 자신이 아직 미숙하고, 또 발전할 여지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 더욱 정진하려는 마인드를 갖추기에 최적의 환경이라고 볼 수 있다.
2. 통찰력(나무를 넘어 숲을 본다)
1:1 전략 게임이라면 모두 1번의 '책임감 증진'에 해당할 수 있다. 이기기 위해서는 자신을 돌아보고 더 발전해야 하니까. 하지만 바둑의 특별한 점은 통찰력의 발휘를 강요한다는 점이다. 장기나 체스 같은 보드게임의 경우 '왕'이라는 주요 타겟이 존재하고, 그 외의 게임들도 '무조건 정답'에 해당하는 일정한 패턴이 존재한다. 그런 것을 바탕으로 생각을 이어나가면 되기 때문에(즉, 큰 그림은 '그냥' 보인다) 디테일에 집중하면 큰 그림이 따라오는 패턴인 반면, 바둑은 그런 패턴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큰 그림을 잘 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원하든, 원치 않든 바둑에서 이기려면 시야를 넓게 가질 수밖에 없다.
이외에도 바둑을 더 깊게 파다 보면 많은 것을 얻어갈 수 있겠지만, 바둑을 '찍먹'하는 정도라면 이 정도를 얻어갈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 두 가지 능력은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기본이 되는 능력이기에 이것만 해도 바둑을 할 가치는 충분하다고 본다. 그리고 가치 이전에 바둑은 재미있는 게임이고,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다. 심지어 현질도 필요 없으니 돈도 안 드는 완벽한 취미라고 할 수 있다. 취미생활을 하면서 책임감이나 통찰력 등을 키울 수 있는 바둑, 강력 추천한다.
사실 이런 복잡한 이야기는 다 잊어도 된다. 게임하면서 머리 좋아지면 좋은 게 분명하니까 말이다.
<24-25 하나은행배 슈퍼매치> 4강전
(흑)박정환(백)신민준
5보 (56수~65수)
<실전진행1>
신민준은 56으로 밀고올라갔다. 57~65까지는 정석이다. 다만 지금 배석에서는 우변의 흑 모양이 넓기 때문에 흑이 유리한 변화이다.
65까지의 진행이 흑이 유리하다면 56으로 다른 수는 없었을까. 처음 떠오르는 수는 <참고도1> 1로 잇는 것이다. 백세모가 지원군으로 와 있기 때문에 2로 씌울 때 3으로 끊어갈 수 있다. 흑이 [가]로 막으면 백은 [나]로 끊어가면 유리한 싸움이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했다면 신민준은 이 길을 갔을 것이다.
<참고도1-1> 1의 붙임수가 절묘한 수이다.
백은 [가]와 [나] 어느 쪽으로 받더라도 좋은 결과를 내기 어렵다.
백이 2쪽으로 받는다면 3,5로 한 발 물러나 막는다. 1,2 교환 덕에 백이 [가]자리 끊을 때 [나]로 뚫어버릴 수 있다.
<참고도1-3> 2쪽으로 늘면 3,5로 누를 수 있다. 백이 하변을 받을 때 9로 늘게 되면 백이 끊어간 것은 헛발질이 된다.
<참고도 1-4> 그냥 흑1,3으로 둔 경우와 비교해 보면 차이를 확연히 알 수 있다. 6으로 두었을 때 흑이 오히려 7로 받아야 한다. 그러면 10의 요처는 백이 선점할 수 있게 된다.
결국 백이 실전처럼 중앙을 밀고 나간 것은 최선으로 보인다. '이거 나쁜 것 같은데...' 싶더라도 다른 신통한 수가 없다면 '그래도 지금은 이게 최선이다'라며 받아들이고 다음 기회를 노리는 자세가 고수의 자세이다.
<실전진행2>
신민준이 66으로 나가자 박정환은 67을 교환해 둔 다음 69로 날아올랐다. 하변을 내주고 우변과 중앙을 차지하겠다는 큰 그림이다. 흑은 가볍게 손이 나오는 반면, 백은 고민할 거리가 많다. 흑을 잡은 박정환이 판을 잘 짜나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고심하던 신민준이 판의 운명을 결정지을 다음 수를 뽑아들었다. 과연 어디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