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은행배 슈퍼매치 4강전 - 박정환 VS 신민준 (4)
내가 국가대표 상비군(2군 그룹이었음)에 있던 시절, 딱 한 번 1군 리그로 승격한 적이 있었다.
당시의 나는 시합은 모두 지고 상비군 리그전만 이기는 신기한 경험을 했었다.
그때 신민준, 박정환 두 선수도 1군에 있었기에 한 판 붙어볼 기회가 생겼다.
만화에서 보면 그런 상황이 되었을 때 투지를 불태운다던가, 강자들과 겨뤄 볼 생각에 기대에 찼겠지만, 나는 그 당시에 시합 성적이 너무나도 안 좋았기 때문에 좀 약한 사람과 붙어서라도 이기고 싶었다. 그때는 그렇게 허무하게 기회를 날렸지만 지금 그런 기회가 다시 온다면... 글쎄, 지금이라고 딱히 다르진 않을 것 같다. 역시 만화는 만화일 뿐. (박정환 상대로는 완패, 신민준 상대로는 반집 역전승할 기회를 아쉽게 놓침)
두 사람과의 기억은 거의 전부가 나 혼자만의 기억에 가깝다. 앞서 말한 1군 리그전에서 딱 한 번 둬본 것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국가대표실에 출근하던 시기의 박정환 사범님(나이 차이가 많이 나면 '사범님'으로 칭한다. 나와 11살 차)은 마주 보기 어려운 사람으로 기억된다. 아, 뭔가 위압감이나 그런 것 때문이 아니고 진짜로 얼굴을 보기 어려웠다. (자율 국대 + 시합이 너무 많음)
민준이 형(나와 5살 차)에 대해서는 기억나는 것이 몇 개 있다. 같은 도장 출신이라서 좀 더 친밀하게 느껴진 것도 있고.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21년 2월에 커제를 꺾고 LG배를 우승했을 때였다. 결승전 내내 열심히 응원했는데, 진짜로 커제를 꺾어내자 며칠 동안은 국뽕으로 가득 찬 나날을 보냈다.
그 다음 기억은 속기전인 YK건기배에서 붙은 것이다. 상대가 상대인지라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채로 대국을 시작했고, 초반에 처참하게 망했다. '에라 모르겠다'하고 달려들었는데 상대가 삐끗하며 살짝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주르륵 무너지며 나는 대마를 잡는 데 성공했고, 기적 같은 역전승을 거두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신민준의 컨디션 난조'를 이야기하는 기사에 'YK배에서도 무명의 기사에게 패했다'며 이 판이 언급되기도 했다. (기자양반, 거 내 이름도 좀 적어주지...)
그 다음은 아마추어도 같이 참가하는 백암배에서의 대국이다. 이 판도 초반에 크게 당했고, 그 이후 기회를 잡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돌아보니 거의 매일 얼굴을 봤는데도 대국했을 때 외에는 접점이 없는 것이 아쉽다. 아니, 그 당시에는 내가 사회성이 좀 떨어졌으니 어쩌면 안 좋은 인상을 덜 남겨서 다행이려나. 나중에 대화할 일이 있으면 밥이라도 같이 먹자고 해볼까 싶다.
...그래, 대화할 일이 있다면 말이지.
<24-25 하나은행배 슈퍼매치> 4강전
(흑)박정환(백)신민준
4보 (39수~55수)
<실전진행1>
박정환은 빠르게 39로 늘었다. 40과 41은 당연. 여기까지는 끊기 전부터 두 선수 모두 예상하고 있었을 그림이다. 박정환은 이 싸움이 자신이 할 만하다고 봤기에 이 진행으로 끌고 왔을 것이다. 신민준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을까?
이 상황에서 프로기사라면 누구라도 <참고도1>의 행마를 떠올릴 것이다. 이 수는 백세모들을 연결하는 동시에 [가]의 약점을 완화하는 효과가 있다. 동시에 흑세모들을 포위하고 있어 흑은 상변을 넘어가야 한다. 이 정도면 백 모양이 괜찮지 않을까?
<참고도1-1> 흑은 1,3을 교환해두고 5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흑이 밑으로 기어 넘어갔으니 얼핏 백이 기분 좋아 보일 수 있는데 꼭 그렇지는 않다. 우선 X의 자리가 전부 흑집으로 굳어졌고 백세모들 역시 뿌리 없이 중앙에 떠 있는 모양이라 실제로는 흑이 실속을 더 챙긴 상황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참고도2> 1로 내려뻗는 자리가 아주 크다. 흑은 2로 중앙을 뚫고나올 것이다.
백은 3,5로 두 점을 살려 나와야 한다. 흑도 6으로 약점을 지킬 수밖에 없다.
그때 7~13으로 밀고나간다. 흑이 15자리에 늘면 14쪽을 파고들어가 싸우고, 14로 받으면 15자리를 젖힌 뒤 좌변을 공격한다. 이런 진행이었다면 신민준이 원하는 흐름으로 이끌 수 있었다. (AI 추산 백 승률 52%) 다만, <참고도 2> 시점에서 이 정도까지 내다보기는 쉽지 않다.
<실전진행2>
신민준은 잠시 고민하다가 42로 중앙을 뒀다. 박정환은 빠르게 43,45를 교환한 뒤 51로 넘어갔다. 크게 손해 본 건 아니지만, 백 입장에서는 다음 수가 궁하다. 신민준이 다시 고민에 빠졌다.
<실전진행3>
신민준은 고민 끝에 52로 귀를 파고들었다. 하지만 53,55로 막히고 나니 <3편>에서 봤던 그 모양과 다를 것이 없다. 아직 차이는 크지 않지만 신민준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백은 귀를 섣부르게 파고들 필요가 없었다.
<참고도3> 1,3,5로 중앙을 두텁게 만들어 두면 흑은 6으로 연결을 해야 한다. 그때 7로 하나 눌러두고 9로 귀를 파내면 된다. 이렇게 두었으면 흑이 약간 편하지만 아직 만만치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