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옷사기
어머니와 나는 옷 욕심이 없는 편이다. 나는 사이즈 문제로 맞기만 하면 그냥 대충 사서 입는다. 어머니는 대학로고가 적힌 목이 늘어난 티셔츠를 즐겨 입는다는 어느 소설 속 남편처럼 당신에게 익숙한 편한 옷이면 닳아 서 해질 때까지 입는 분이다. 최근 어머니의 홈 웨어는 내가 고등학교 때 산 옷이다. 색도 변하지 않고 구멍도 나지 않았다. 옷감의 종류가 뭐드라.... 아무튼 그런 분이다. 아버지는 전부터 옷을 좋아하셨다. 학생들이 선물로 사준 옷들도 있지만 , 본인이 사 입은 옷도 상당했다. 나이가 들고 몇 차례의 병치레 그리고 치매 발병 이후 아버지는 체중이 20킬로도 넘게 줄었다. 옷이 다 커서 안 맞게 된 상황이 된 거다.
이사 올 무렵 아버지의 체형 변화를 문제 삼고 내가 버린 옷이 파란 재활용 비닐로 20개도 넘었다. 헌 옷 취급 업자가 가져갔다. 그래도 살아남은 옷이 몇 개 있는데 지난번 옷 문제로 어머니와 다투신 후 갑자기 새 코트를 사시겠다 말씀하셨다. 시골이나 다름없는 우리 동네 근방엔 남성복 가게가 없다. 지하철 타고 백화점이 있는 곳까지 나가야 하나 싶었다. 백화점은 비싸잖나 싶기도 하고 좀 심란했다. 다음날이 교회 가는 날인데.. 인터넷으로 주문해도 당일 배송은 안되고...
인터넷을 검색하니 웰메이드 대리점이 있었다. 제품 가격 검색을 하니 싸지는 않다. 아버지는 같이 가보자 말씀하셨다 .어머니가 나를 쿡쿡 찌르며 비상금 쓸 모양이라 말씀하셨다. 카카오택시를 불러 부모님과 함께 가게로 갔다.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겨울코트. 왜 이제 오세요 하듯 눈에 들어왔다. 가격표를 보니 80만 원이 넘는다. 헉... 할인을 한다 해도 40만 원이 넘는다. 아버지는 키가 큰 편이라 웬만한 옷들이 다 잘 맞는다. 안성맞춤이라 할 만큼 아버지 옷이었다. 나무랄 구석이 없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지갑을 건네시고 결제를 하라말씀하셨다. 당신 거 뭐 챙길 땐 이렇게 멀쩡하시다. 얼마나 입 는다고 이렇게 비싼 걸 사나 싶은 생각을 하는데 가게 주인이 내 표정을 읽었는지 얼마를 입더라도 나이 드신 분들은 가볍고 따뜻하고 좋은 옷을 입어야 한다고 말한다. 예.... 예.. 그렇죠.
옷들을 좀 더 구경하다 보니 겨울 바지가 상당히 괜찮다. 큰맘 먹고 내가 아버지 바지를 한벌 샀다. 바지가 커서 벨트로 동여매 입고 계시는 게 거슬리던 차였다. 지난번 아버지 여동생이 기모 청바지 두벌을 사준 것을 외출할 때 입으시는데, 이 바지도 새로 산 코트랑 잘 어울릴 것 같다. 아버지는 나에게 뭐 해준 것 없어도 나까지 그러면 안 되겠지. 겨울 패딩 하나 마음에 드는 것 살까 하고 쟁여둔 돈인데 ㅠㅠ 이놈의 맏이 근성은.. 필요 없단 소리 안 하시는 걸 보니 기분이 좋으신가 보다. 제발 이거 받으시고 당분간 저 좀 괴롭히지 말아 주세요..
집에 오자마자 다툼의 원인이 된 갈색 코트를 챙겨 버렸다. 겨울 바지 한벌 버렸다. 하나 들여오면 내놓는 거라고 단호하게 말한 후 아파트 옷수거함에 버렸다. 치매가 온 노인들이 주변에 좀 있는데, 아버지는 그분들보다 상태가 양호하시다. 퍼즐 빠지듯 구멍 난 기억과 전보다 더 고집스러워지신 정도다. 아.. 나한텐 더 지독하게 구시긴 한다. 사촌 여동생이나 외사촌 오빠는 우리 아버지 정도면 자기들은 걱정할 일도 없을 거란다. 최소한 물건이 날아다니거나 욕을 하는 일은 없잖느냐고 한다. 그건 그렇지 뭐.
그건 그렇고 저 정도 비상금을 어떻게 모으셨나? 아버지 여동생이 준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