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권문제
1999년 당시 정부는 "특기 하나만 있어도 대학에 갈 수 있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무시험 대학 전형과 내신 위주의 입시 제도를 도입했다. 이 정책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1983년생(2002 학번)들을 흔히 '이해찬 세대 1기'라고 부른다 국어, 영어, 수학 중심의 획일적인 교육에서 벗어나 학생들의 소질과 적성을 살리겠다는 취지로 한 가지만 잘해도 대학에 갈 수 있다고 했다. 덕분에 야간 자율학습이나 모의고사가 대폭 줄어드는 파격적인 변화가 있기도 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현장에서는 혼란이 컸다. "공부 안 해도 대학 간다"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전반적인 학력 수준이 낮아졌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정작 대학 입시에서는 변별력 문제로 인해 이들이 '마루타 세대'라 불리며 고통받기도 했다. 역설적이게도 학교 교육이 느슨해진 틈을 타 사교육 시장이 급팽창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세대는 이후 취업난까지 겹치며 고단한 시기를 보내게 되었다. 한마디로 치열한 경쟁의 시기가 열리는 계기를 대장 부엉이 운운 치하받는 어떤 인사가 만들어준 것이다.
'이해찬 세대'의 사례는 준비되지 않은 교육 정책이 한 세대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다. 정치 교육이 부재한 상태에서 투표권만 부여하는 것이 왜 위험할 수 있는지, 법적·사회적 관점에서 공감되는 부분들이 많다. 받아들여지지는 않겠지만 교육을 받아야 하는 현장의 아이들에게 투표권 부여 운운 하는 것은 교육을 자신들의 정치적 이념 실현을 위해 이용한 세대와 무엇이 다른가. 특히 그 말이 보수 정치인대표라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이 경악스럽다. 보수주의자는 혁명 적인 변혁이 아닌 점진적 개혁을 추구한다. 투표 연령 18세는 나름 타당한 이유가 있다. 모든 청소년이 대학에 가거나 모든 청소년이 보호자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현실의 예인 보호 종료아동은 만 18세에 시설을 나와 사회인이 된다. 시설에서 나와 홀로서기를 시작해야 하는 나이로, 국가의 정책이 본인의 생존과 직결되는 시점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나를 결정할 표'를 주는 것은 권익 보호 차원에서 논리적 타당성을 갖는다. 이는 민법상 성년 연령(19세)과도 근접하며, 실제 사회적 활동(취업, 운전면허 등)이 시작되는 단계여서다.
민법에서 미성년자를 '제한능력자로 규정하고 그들의 법률 행위를 취소할 수 있도록 보호하는 이유는, 이들이 아직 독자적인 판단을 내리기에 지적·심리적으로 취약하다는 점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경제적 계약 하나에도 보호자가 필요한 미성년자에게,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정치적 행위'를 맡기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16세는 여전히 의무교육 체계 안에 있으며, 부모의 친권과 보호 아래 있는 '전형적인 미성년'의 시기다. 이들에게 정치적 결정권을 주는 것은 권리만 있고 책임(법적 책임, 경제적 자립)은 없는 불균형한 상태를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 교육 현장에는 중립적이고 체계적인 정치 교육 시스템이 부족하다. 이런 상황에서 투표권만 하향할 경우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교사나 주변 환경의 정치적 성향에 쉽게 휩쓸릴 위험이 있다. 논리적 판단보다는 감성이나 군중심리에 취약한 연령대를 정치권이 표 계산을 위해 이용할 가능성(포퓰리즘)에 대한 우려 역시 크다.
지금은 스무 살이 넘은 조카가 중학생이던 시절, 올케와 의견이 맞아 사회 현상의 양면을 바라보는 훈련을 하라고 교육했다. 다행히 조카는 잘 자랐다. 냉정하고 분별력 있는 사고를 하는 성인이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최근 촉법소년 범죄의 흉포화로 인해 연령 하향에 대한 목소리가 높다, 그럼에도 법무부 등에서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여전히 '교화와 보호'라는 가치를 무엇보다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형사처벌을 하기에는 "아직 어리고 미성숙해서 판단력이 부족하다"라고 보호하면서, 투표할 때는 "성숙한 시민이니 표를 달라"라고 하는 것은 법적 일관성이 결여된 주장이다.그 말을 하면서 이 부분은 생각이나 해 봤는지 모르겠다. 과거 교육 정책이 그러했듯, 정치권이 16세 투표권을 주장하는 것이 과연 '청소년의 주체성'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특정 진영에 유리한 표밭을 확장하려는 '정치적 계산'인지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준비되지 않은 세대에게 권리만 쥐여주는 것은 결국 그들을 다시 한번 정책적 실험 대상으로 만드는 일일 수 있다.
무엇을 생각하든 부정적 의미에서 그 이상을 보여주는 이들이 너무 많다. 세상에는 그리고 특히 정치권에는 말이다. 나 역시 미성년자 시기에는 나이가 장애물이 되는 현실이 답답했었다. 대학에 들어간 1987년 나는 시위는 할 수 있었지만, 투표는 할 수 없는 나이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기에 세상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힘을 더 기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싶다. 변화를 거부하지는 않는다. 나 때는 말이야 운운하는 꼰대가 되려는 것 아니다. 세상이 얼마나 급격하게 변하는지 제도권 교육이 얼마나 무용할 수 있는지도 잘 안다. 그럼에도 제도권 안에서 일정기간 교육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생각하는 법과 함께 어울리는 법을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청소년은 무엇보다 미성년자는 실험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교육은 백년지 대계라는 말처럼 아이 하나를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 정말 조심스러운 태도로 교육받을 세대를 다루게 되기를 정말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