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서 전학 온 아이

1980년 5월

by 아이린

이름은 기억이 안 난다. 40년도 더 전에 만난 아이여서 그런 것 같다. 중학교 2학년 되자마자 짝이 된 아이였다. 단발머리에 눈이 크고 쌍꺼풀이 진한 아이였다. 예뻤나? 그 아이에게 기억이 나는 것은 사투리였다. 어머니가 경상도 사람인 탓에 경상도 사투리는 익숙하지만, 그 아이가 쓰는 것은 내 주변에 전혀 없던 그리고 당시 반에도 눈에 띄게 쓰는 아이가 없던 전라도 사투리였다. 표준말이라고 하는 서울말을 쓰지 않는 아이는 작년 그러니까 81년 여름방학 이후 서울로 전학을 왔다고 했다. 어디서 살았냐고 물으니 광주라고 말했다. 거기서 태어나고 자랐다고 했다. 당시에 는 광주 민주화 운동이라고 불리지 않던 광주 사태를 직접 경험한 아이였다. 약간의 호기심으로 너도 80년에 생긴 일을 기억하느냐 뭐 본 것 있느냐 물었다. 나를 비롯해 광주 밖의 사람들은 아니 특히 나는 뉴스에서 말하는 것을 모두 믿던 어리석은 아 이였다. 정말 그 동네에서 나라를 뒤집으려는 사람들이 있는 줄 알았다. 그 애는 부모님이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못 나가게 하신 탓에 직접 본 것은 없지만 헬리콥터가 나는 소리 요란한 총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총을 든 군인이 집집마다 뒤지고 다녔고 자기가 살던 집에도 찾아와 무서웠단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있던 시기도 아니고, 티브이 뉴스나 종이 신문에서 말하는 내용 외엔 , 무슨 일이 있는지 알 길이 없던 시기였다. 성인들도 그랬겠지만 미성년자들은 더 제한된 정보와 지식밖에 얻을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 대학에 갔다. 유학을 목적으로 공부하던 탓에 당시에도 상당히 비싼 어학원에 다녔다.(유학은 못 갔다ㅠㅠ. 대한민국의 장녀여서 그렇게 되었다) 프리 토킹 시간에 어쩌 다가 한국의 정치 이야기가 나왔다. 6월 10일 민주화 운동이 막 지난 때였다. 잘생긴 백인 남성인 영어 교사는 누군가가 5월 18일 광주의 이야기를 꺼내자 못 들을 것을 들었다는 얼굴로 그건 그건 학살이라고 말했다. 학살? 시기는 기억이 안 난다. 1987년 5월 경이었는지 1988년 5월이었는지 캠퍼스 내에서 광주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사진전이 있었다. 사진전 이라기엔 사진의 질이 조악하였지만, 그 사진 속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사진은 금방 교내 관계자가 치웠다.


5.18 이후 1주년이 된 1981년부터 1996년까지는 5.18 유족회와 부상자회 등 관련단체와 전남대학교, 조선대학교 등 지역 대학의 총학생회 등이 함께 주관하는 형태로 망월동 구 묘역에서 추모 행사가 열렸다. 당연히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추모 행사의 규모는 작았고 정부의 눈치를 봐야만 했다. 1995년 5.18 특별법이 제정되고 1997년 5.18 묘역 성역화 작업에 따라 현재의 신묘역이 마련된 이후 5.18 추모·기념행사는 매년 5월 18일마다 신묘역 추모탑 앞에서 국가 보훈처의 주관으로 정부 기념식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1997년 첫 정부 주관 기념행사에는 당시 고건 국무총리가 행사의 주빈 역할을 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5.18 기념행사에 처음 참석한 것은 20주년 기념식이 열렸던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었다. 넓게 보면 1979년 12.12 군사반란 직후부터, 좁혀 보면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내란과 폭동을 저지르고 이에 저항한 무고한 광주 시민들을 학살한, 광주 시민들과 국민들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사건이다. 이러한 학살 사건을. 5.17 내란의 연장선으로 보는 측면에서 '5.18 내란'이라고도 하며 이는 시민들의 민주화 운동을 뜻하는 용어는 아니다. 처음에는 신군부에 의해 광주폭동 당시 매스컴에서는 광주사태 또는 광주소요사태 등의 이름으로 불렸으나, 점차 시대가 변하면서 광주민중항쟁, 광주민주항쟁, 광주학살 등으로 부르거나, 일어난 날짜를 줄여서 5·18로 부르기도 한다. 대한민국 초·중·고 교과서에서는 5.18 민주화 운동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어느 정신 나간 사람이 "거의 피를 흘리지 않고 민주화를 이끌어내는 대역사적 대타협을 한 전두환·노태우 대통령"이라며 국민의힘 당사에 사진을 걸자고 말했다. 비난이 쏟아지고 진계 요구가 빗발치자 강명구? 친 윤석렬계 국회의 원이 징계가 아닌 토론의 대상이란다. 광주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의 숫자 다친 사람 숫자 그리고 오랜 시간까지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이들의 숫자는 그들의 염두에 없나 보다. 전두환은 대통령 집권직후 80년 9월 광주를 방문하여 지난번

광주의 시끄러운 일은 역사흐름의 불가피한 진통이므로 (전남) 도민들이 80년대 새 역사창조에 선도적인 역할을 하면 나도 용기를 갖고 국민들께 충성을 다할 것이다라는 망언을 하여 결국은 5.18문제의 책임이 전두환 자신에게 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거기에 한술 더 떠 1980년 9월 17일 전두환은 미국 언론인 로버트 노바크 씨와의 인터뷰에서 "만약 지난 5월에 발생한 광주의 폭동사태가 또 다른 2개 도시로 확산되었다면 북한의 지배자인 김일성은 10만의 병력을 침투시켰을 것입니다. 사회적 불안 무질서 폭동사태가 바로 그러한 이유로 용납 안 되는 이유입니다"라는 근거 없는 추측성 망언으로 큰 논란을 빚었다


거기에서 벌어진 수많은 폭력이 눈 감고 외면하면 사라지는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과거에 벌어진 잘못을 적극적으로 밝히고 후속 조치를 취해야 앞으로 갈 수 있다. 지나간 일에 얽매이자는 게 아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장애물을 제거하자는 것이다. 철저한 사과 그리고 반성이 없이는 미래가 없음을 이런 막말을 쏟아내는 이들이 알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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