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추억 팔이 아니다. 기억 속에서 사라지기 전에 정리해 두려는 것일 뿐이다. 사실 대학 생활에 대한 큰 기대는 없었다. 아버지가 나온 S대에 들어가지 못했고 그렇다고 어머니가 나온 500년 넘는 전통의 S대도 아닌 선교사가 세운 S대 아버지는 이왕이면 Y 대라도 갔어야 하지 않느냐 기껏 거기냐 하는 에이 생각하니 화나네울 아버지는 당신이 내게 그런 말로 상처 입힌 것도 기억 못 할 텐데.... 나는 대학 입학 학력고사 세대(1982-1993년도)다. 고등학교 때 내신이 좋았다. 단 일부 과목 성적 특히 수학을 빵점 맞는 등 엉망이었고, 과학은 그럭저럭 선생님들이 수학을 그냥 한 번호로 찍으라고 풀 생각 말라고 당부하신 덕에 빵점은 면했다 국어와 영어 사회 과목만 만점이면 뭐 해 다른 건 엉망인데.
재수를 할 생각은 없었다. 담임은 재수를 권했지만... 마지막 모의고사에서 전국석차 100위 안에 들었단다. 수학을 제치더라도 나머지 과목 점수 과학과목이 예전 내 점수보다 월등하게 잘 나왔고 국어 영어 사회 역사등 만점. 공부를 다시 더하면 된다고 하셨다.
나는 유학을 가서 영화를 공부하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그래서 한 학기만 다니고 말 거라고 문제없이 갈 과를 특히 수학 그리고 과학과 관련 없는 과로 골라달라 했다. 내 점수로 들어갈 대학은 S 대였다. 선교사가 세운.. 상도동에 있는 1 지망 2 지망 중에서 1 지망은 그 학교에서 가장 유망한과 2 지망은 찍어서 법학과 점수가 높고 내신도 좋으니 무난히 사회사업 학과에 갈 수 있을 줄 알았다.1 지망이 아니라 2 지망에 합격했다. 어이가 없었다. 웬 법학? 한 학기만 다닐 건데 뭐 어쩌랴 이런 마음으로 학교에 입학했다. 명문대가 아니어서 가족에게 기죽고 전혀 생각도 안 하던 과에 들어가 남학생들 틈에서 공부한다는 생소함에 힘들었다 뭐 내성적 성격 탓에 선을 하도 그어서 내 옆에 오는 애도 별로 없었다 그래도 몇몇 가지는 기억이 난다. mt에서 내가 2 지망 합격자라고 하니 경악하는 선배들. 우리 과가 어떻게 사회 사업과에 밀리냐 등등 나도 알 수 없었다. 내가 여기 왜 들어왔는지. 여학생이 하나이니 대출도 불가능했다.
토플을 준비하고 시험을 치고 지원을 해 캘리포니아에 있는 모 대학에서 어드미션을 받고 기분이 좋았다. 학교 그만두고 2학기에는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한다고 꿈에 부풀어 있을 때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 일은 내 인생을 바꿨다. 지금의 나라면 단식투쟁을 하든 뭔 짓을 해서라도 미국에 갔을 텐데 , 당시의 나는 전형적 k 장녀였다. 울면서 난동을 부리든지 손목을 긋든지 했어야 했다. 나름 반항적이고 못된 성질이라 생각한 내게도 불행하게 K장녀 기질이 남아 있었다. 남동생이 9시 뉴스에 나올만한 사고를 치고 경찰서에 끌려갔다.. 미성년자인 데다가 쌍방 폭행이어 었고 보호자 합의로 나왔지만 동생이 저지른 일은 동생 학교에 통보되었다. 그전에도 소소한 말썽을 부리던 아이에게 무기정학 조치가 내려졌다.
내가 평범한 고3시절을 보내지 못하게 하고 공부라도 잘하지 않으면 주목도 못 받게 만든 내 동생 때문에 할머니는 죽는다고 누우셨다. 식음을 전폐하시는 단식 투쟁에 들어가신 것이다. 내가 떠나기로 한 유학길에 동생이 들어섰다. 소위 말하는 도피성 유학이다. 우리 집은 둘을 유학 보낼 능력은 안되었다., 할머니는 동생을 미국 보내지 않는다면 죽겠다고 그러셨다. 눈물도 말랐다. 나는 포기했다. 부모님에게 동생을 보내라고 말했다... 동생은 나에게 전혀 미안함을 표하지 않았다. 그 애는 당연하다는 듯 떠났다
영화 연출을 공부하겠다는 내 꿈은 날아가고 전혀 관심도 없던 법학을 공부해야만 했다. 부모님 외의 사람들은 낙동강 오리알이 된 내 신세를 안타나까와 하지 않았다. 너무 당연한 거 아니냐는 할머니에게 나는 마음으로 깊은 증오를 품었던 기억이 난다.
1987년 하반기는 내 꼬일 대로 꼬이는 인생이 시작된 시기였다. 속된 말로 지 팔자 지가 꼰 것 그게 나다. 이기적이려면 끝까지 이기적이어야 했는데 이도 저도 아닌 얼치기 그게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