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평범성

책을 읽다가

by 아이린

읽기가 어려운 책들이 좀 있다. 짧은 문장임에도 생각을 많이 요구하는 글들과 그냥 그런 서술임에도 한참 동안 곱씹고 그 의미를 생각해야 하는 그런 글들 말이다. 아직도 읽고 있는 중인 책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이다. 거기에서 그는 말한다.

"아이히만 당신과 당신의 상사들은 누가 이땅에 살 권리가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행동했소. 그래서 유태인과 다른 민족 사람들과는 함께 살 수 없다는 정책을 펴왔소 이제 우리 중 그 누구도 이 땅에 존재하는 인류 중 그 누구도 당신과 이 땅에서 살 수 없음을 밝히오. 이 이유만으로도 당신은 교수형에 쳐해 져야 하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은 20세기 가장 논쟁적이고 중요한 철학적 개념 중 하나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악마화하지 않고 우리 주변에서 발견되는 보통 사람으로 묘사했다는 이유로 엄청난 비난에 시달렸다고 한다. 즉 극소수 인만이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네 보통 사람도 그러한 악을 실행할 수 있음을 이야기한 탓이란다.


악의 평범성이란 무엇인가?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보면서 그가 흔히 상상하는 '악마적인 괴물'이 아니라는 점에 충격을 받았다. 오히려 아이히만은 지극히 평범하고, 성실하며, 심지어 가정에서는 자상한 사람처럼 보였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국가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을 뿐이며, 자신의 행동이 수많은 유대인 학살로 이어질 것이라고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아렌트는 악은 사악한 의도를 지닌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결과 의미들에 대한 생각이 없이 그저 주어진 명령 그리고 사회적 관습에 무비판적으로 순종하는 보통사람들에 의해 행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전체주의 하에서는 (무엇이 전체주의인지는 이야기 안 할 테다.) 개인의 독립적이고 도덕적 사고는 마비된다. 악이란 것은 광신적이거나 사악한 의도를 가진 특별한 사람들에 의해서만 저질러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나 결과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저 주어진 명령이나 사회적 관습에 무비판적으로 순응하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행해질 수 있다고 아렌트는 말한다.


사람들은 깊은 생각이 필요 없기에 소위 말하는 상식에 따라 행동하며( 요즘 보면 그 상식이 뭔지 의문이 들 때가 많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을 깊이 생각하지 않음으로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부과한다. 나 역시 이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고 김대중 대통령이 그랬다. 잘못에 대해서 큰소리로 말하기 힘들면 벽을 보고라도 소리치라고. 솔직히 입을 다물고 생각하지 않고 고개를 돌리면 편하다. 나와 내 가족만 생각하고 그렇게 살면 편하다. 그러다 간혹 끔찍한 사건이 발생하면 가해자를 악마화하며 그와 우리는 다르다고 위안을 삼는다.

범인이 잡힌 후에 보면 그는 우리 가운데 있던 보통 사람일 때가 많았다. 나도 아렌트처럼 생각한다. 악은 특별한 이의 전유물이 아니라 나와 당신 같은 보통 존재 가운데도 존재한다고. 말이다


악의 평범성을 언급하기 위해 실행된 실험이 두 가지 있다.

밀그램 복종 실험 (Milgram experiment): 권위 있는 인물의 명령에 따라 평범한 사람들이 타인에게 고통을 가하는 전기 충격을 주도록 지시받았을 때, 상당수가 명령에 복종했다는 것을 보여준 실험이다.

스탠퍼드 감옥 실험 (Stanford Prison Experiment): 평범한 대학생들이 간수와 죄수 역할을 맡았을 때, 간수들이 권위에 복종하여 죄수들에게 잔혹한 행동을 가하고, 죄수들 또한 무기력하게 복종하는 모습을 보인 실험이다.


이러한 실험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특정 상황과 체제 하에서 쉽게 악행에 가담할 수 있음을 보여주며,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개념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제시되기도 한다. 악은 특별하고 예외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이 아니라 생각을 포기하고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때 생기는 현상이다. 문제는 요즘처럼 생각이 사라지고 팝콘 프레인이 만연한 시대에서 자라나는 또 다른 악이다. 그걸 막을 힘이 과연 당신과 나에게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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