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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삐 Mar 06. 2022

51. 해피이벤트(háppy evént)

드디어 방을 빼다

만나서 반가워!


"박지선 산모님!”

누군가 다급하게 나를 부르는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다. 나는 굉장히 기분 나쁜 꿈을 꾸는 중이었다. 누구지? 나를 반갑게 깨워주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눈을 뜨자 마자, 차라리 안깼으면 좋았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극한의 고통이 밀려왔다.     


‘나 할복한 거야?’

‘칼에 맞아 죽으면 이런 느낌일까?’ 

내 앞에 서있는 남편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내가 죽은 건 아니구나.’ 안심했지만 밀려오는 통증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누군가 내 배를 날카로운 칼로 사정없이 난도질 했고 그 위에  큰 돌덩이를 올려놓은 느낌이 들었다.


남편은 약간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기는 건강하게 잘 태어났어. 보고 싶지? 사진 보여줄까?"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보고 싶지 않아, 그냥 난 지금 아파. 그것도 너무 아파.”

그리고 이 말을 덧붙였다.

여보, 둘째는 없어.”


내가 극한의 고통을 맛본 날은 우리 순둥이가 갑작스럽게 세상에 나온 날이었다.

그 전날은 구정 연휴 첫날이었다. 3일 뒤 제왕절개 수술을 하기 위해 보건소에서 PCR 검사를 하고 온 날이기도 했다. 다음날은 마지막 만찬이 예정되어 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외식하는 게 겁나서 못갔던 아웃백에 가기로 약속하고 소풍 가기 전날 밤의 기대와 설렘으로 잠을 청했다.

한밤중에 소변이 마려워 화장실에 다녀왔다. 다시 자려고 침대에 눕자마자 몸에서 물이 나오는 느낌이 들었다. 소변인 줄 알 참아보려고 괄약근을 조였는데 전혀 내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양수라는 걸 직감했다.

“여보!!!” 있는 힘껏 소리를 질러 잠든 남편을 깨우고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나는 남편에게 출산 트렁크를 챙기라고 말하고 화장실에 들어가 간단하게 샤워를 했다. 양수가 계속 새서 팬티에 오버나이트를 댔다.

양수가 조금씩 새고 있어서 지하주차장까지 어그적어그적 걸어갔다. 새벽이라 보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지. 누가 내 모습을 뒤에서 봤으면 얼마나 웃었을까.

남색 롱패딩을 입은 게 꼭 펭귄이 뒤뚱뒤뚱 걷고 있는 것 같다고.


병원에 도착해 내진을 했다.

내진이 뭔지 몰랐는데, 와씨, 욕할뻔했다.

나는 수치스럽고 아파서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데 간호사는 쓸데없이 다정하고 차분하게 말했다.

"양수가 새는 게 맞네요. 자궁문을 2cm 정도 열렸구요."


역아라서 응급 수술을 해야 했다. 또 코로나 검사를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보건소에서 하지 말걸..


설날 당일이라 그런지 출산을 기다리는 산모는 나 혼자였다. 의료진도 별로 없었다. 마취과 선생님도 연락을 받고 병원에 도착했다. 새벽 4시쯤 수술대에 올랐다.

수술대는 정말 차가웠다. 옷을 벗고 있어서 그런지, 수술대 자체가 차가운 건지, 소독약이 차가운 건지.

온몸이 덜덜 떨리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처음 보는 당직 선생님이 내 수술을 맡았다. 모든 것이 낯설고 무서운 이 느낌.. 모든 상황이 공포 그 자체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취약은 내 몸에 퍼져 나를 잠들게 했다. 아주 기분 나쁘고 정신없는 꿈을 한바탕 꿨다.

눈을 떴을 때는 모든 것이 끝나 있었지만 고통의 시작이기도 했다.

개복수술을 과소평가한 탓일까.

나는 눈을 뜨자마자 아프다는 말을 수없이 반복했다.

이라도 들어서 통증을 잊고 싶었지만, 간호사는 잠이 들면 안 된다고 했다. 남편은 내가 잠들지 않도록 말을 계속 시켰다. 나는 두 시간 동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고통 속에 아기를 기다렸다.


아기를 처음 마주하면 경이롭고 신비롭고 아름다워서 감동의 눈물이 쪼르르 흐른다고 하던데, 눈물이 안 났다. 내가 아이를 보고 했던 말은 “너무 작다, 작아.” 그 말뿐이었다.

사실 뭐라고 말하기에는. 

뭐랄까. 빨갛고 쪼그맣고 쭈글쭈글한 생명체를 앞에 두고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기를 잠깐 보고 난 후 나는 입원실로 옮겨졌다.

하루 동안 물도 못 마시고 침대 위에서 꼼짝하지 못했다. 나는 아랫도리에는 소변줄을, 왼 팔에는 무통주사를, 오른팔에는 수액주사를 꽂았고 배에는 페인 버스터를 달았다. 무통주사와 페인 버스터가 있었음에도 몸을 뒤척일 때마다 통증이 밀려왔다.  


출산 다음날 아침, 소변줄을 뺐다. 간호사가 빠르게 회복하려면 수시로 걸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내 몸이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아파 죽겠는데 바로 걸으라고?!! 지금 제정신이야?!!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지만,

누워서 움직이지 않으면 ‘장유착’이 된다고 하니 아프더라도 걸어야만 했다. 소파에서 잠도 제대로 못 잔 남편을 집에 보내고 느릿느릿 병원 복도를 걸어 다녔다.


입원 셋째 날, 방귀를 뀌기 위해서 몸을 마구 움직였다. 방귀가 나온 후에야 물과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이날부터 모유수유를 하러 오라는 전화가 왔다. 아기를 만나는 건 설레고 기분 좋은 일이었지만 몸도 회복되지 않은 상황에서 다짜고짜 모유를 먹이라고 하니 정말 난감했다.

처음이라서 낯설고 서툴기만 한데 당장 해야 하는 상황이라 혼란스러웠다.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한 초보 엄마라 아기한테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4박 5일을 입원하고 퇴원하는 날이 되었지만 몸은 계속 아팠다. 퇴원 전 진통제 주사를 맞았지만 이 몸으로 과연 조리원에 가 편히 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통증이 계속되었다.


모든 엄마가 이런 출산 과정을 겪는다고 하니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래서 엄마는 위대하다고 하는 건가 보다. 한편으로는 배신감도 들었다. 이렇게 아프다고 말했으면 출산을 다시 한번 생각했을 거 아니야!! 괜찮다고 한 사람 누구야!! 제왕절개 할 만하다고 했던 사람 누구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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