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우리 동네 집에는 집에 딸린 문이 있을 뿐 담장이나 대문, 울타리가 없었다. 우리 집은 디귿자 구조였는데 일렬로 부엌이랑 방 두 개가 있고, 부엌 앞에는 외양간이, 끝쪽 방 앞에는 방 하나와 창고가 나란히 있었다. 방 앞에는 제법 큰 마루가 있고 마루 끝에 문이 달려 있었다. 뒤쪽 마당에는 장독대랑 짚을 엮어 빙빙 돌려 올린 영이 2m 높이로 세워져 있었다. 할머니는 식구 중 하나가 감기만 앓아도 영 앞에 서서 용왕신, 산신령 등 온갖 신을 부르며 빌곤 하셨다. 우리는 그 근처에도 못 가게 하셔서 영을 자세히 본 적은 없었다. 뒷마당은 수수대로 울타리를 쳤는데 2m쯤 자란 수수대를 촘촘하게 잎사귀째 엮어 만들어 뒷마당은 바깥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고 바람도 들어오지 않아 아늑하고 따뜻하면서도 딴 세상에 있는 듯했다. 집 앞에는 텃밭이 꽤나 넓었다.
하루 일과는 이랬다. 아침에 눈을 뜨면 우리 논에 있는 샘에 세수를 하러 간다. 그 동네 여덟 집 사람이 모두 그 샘에 나와 세수를 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물기가 다 마를 때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집에 와서 무명으로 만든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냈다. 아침밥은 배추 겉잎이나 무시래기로 끓인 국에 된장에 박은 장아찌나 고추장밖에 없어도 맛있게 먹었다.
식사 시간 @Google
밥상을 물리고 나면 어머니가 내 등에 동생을 업혀 주시고 하루가 시작된다. 아기를 업고 할 일이 없는 나는 서당 앞에 가 서성거리다가 아기가 잠들면 뜰에 기대앉아 형들이 천자문 외는 소리를 듣는 게 일이었다. 형이 둘 있었는데 작은 형은 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큰 형은 서당에 다녔다. 그때는 초등학교 6년을 마치면 중학교에 다니거나 돈이 없는 집 아이들은 서당에 다녔다. 너도 조금만 더 크면 학교에 보내 주마 아버지가 말씀하시곤 했다.
아홉 살 되던 해, 고구마 캐는 날이었다. 밭에서 배가 고파 생고구마를 하나 먹었는데 체했는지 다 토하고 말았다. 그때부터 서너 달을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시들시들 아프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먹은 것도 없는데 배가 점점 불러서 임신 막달만큼 나와 혼자 소변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아홉 살짜리 손이 퉁퉁 부어서 사람 손 같지 않아 보였다. 한약방에서 약을 지어왔는데 팥알만 한 걸 한 번에 30개씩 하루에 세 번 먹으라고 했다. 한 번에 30개를 모두 먹을 수 없어 두 번에 나눠 먹는데 너무 곤욕스러웠다. 그래도 낫는다는 생각에 약은 참고 먹었으나 짠 음식을 먹으면 안 된다고 흰 죽만 먹다 보니 나중에는 김치를 먹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어머니가 이웃집에 가기만을 기다렸다 몰래 부엌에 들어가 김치를 통째로 꺼내 정신없이 뜯어먹었다. 짠 김치를 들입다 먹고 나니 물을 벌컥벌컥 마시게 되어 병이 더 한지도 모르겠다.
한약 @Google
3개월간 한약을 먹었으나 효험은 없고 병이 점점 심해졌다. 동네 어른들께서 얘는 다시 살아나기가 어려울 것 같다고 걱정을 하셨다. 동네에 여섯 살 아이가 같은 증상이었는데 한약방 가서 침 맞고 치료받다 죽은 적이 있었다. 아버지가 여기저기 수소문해 폐병도 고쳤다는 양의사를 모시고 왔다. 의사가 진찰을 하더니 내 배 속에 물이 들어 있는데 이대로 두면 몸속에서 고름으로 변하여 치료할 방법이 없으니 빨리 물을 빼내야 한다고 했다. 어른들이 놀라 어린아이 뱃속에 무슨 물이 들어 있느냐니까 그러면 물을 보여주겠다며 의사가 한 뼘쯤 되는 주사 바늘로 배꼽 밑을 찔렀다. 바늘을 반밖에 못 넣었는데 내가 용을 쓰고 발버둥을 치니까 주사 바늘 부러지면 위험하다며 중지했다. 그리고 3일 이내에 병원에 입원하면 고칠 수 있지만 일주일을 넘어가면 못 고친다고 말하고 돌아갔다. 내가 무서워 죽을 듯이 벌벌 떠니까 아버지가 “네가 의사 선생님 말을 안 들으면 죽는다는데 주사 맞고 살아야 하지 않겠냐?” 말씀하시며 밤새 설득하셨다. 죽는다는 얘기를 들으니 덜컥 겁이 나서 발버둥 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아버지가 의사가 믿을 만한 사람인가 알아보시고 오셨다. 일가친척 되시는 분이 그 의사가 고친다고 한 사람은 다 나아서 갔으니 빨리 데리고 오라고 하셨다.
다음 날 발목이 푹 파묻힐 정도로 눈이 오고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아버지가 나를 지게에 지고 일어나는데 찬바람과 함께 들이 마신 숨이 뱉어지지 않고 멈추었다. 재당숙이 그 모습을 보고 얼른 지게에서 끌어내렸다. 가다가 일 나겠다 싶어 재당숙 집에 있는 소달구지에 태워가기로 했다. 아버지가 수레 위에 이불을 깔고, 요를 뒤집어 씌워주셨다. 소달구지를 타고 가려니 큰길로 돌아서 가느라 30리 길을 아침 먹고 출발해 해 넘어갈 때에야 도착했다. 펀펀한 언덕 한가운데에 큰 소나무가 있는 집이 병원이었다.
소달구지 @Google
다음날 오전에 진료실로 가니 의사가 집에 가지고 왔던 주사기를 다시 내놓았다. 마음속으로 '괜찮다 괜찮다 저거 맞아야 살 수 있다' 주문처럼 외우니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배꼽 밑에 주삿바늘이 다 들어가게 밀어 넣고 쭉 잡아당기니까 누런 물이 나왔다. 분유 깡통 같은 곳에 세 통이나 가득 채울 정도로 물이 나왔다. 뱃속에 물이 얼마나 많이 찼는지 주삿바늘이 밀려 빠져나오기도 했다. 삼 일 동안 세 통씩 물을 빼내니 몸에 부기가 빠지고 배만 뽈록하게 되었다. 다음엔 얼마 동안 한 통씩 물을 빼고, 그 담엔 며칠 동안 반 통씩, 그 담엔 주사기로 서너 번씩, 양을 줄여가며 한 달 동안 물을 빼냈다. 나중에는 작은 주사기로 빼냈는데 며칠 지나니까 창자를 찌르듯이 아파왔다. 더 이상 주사기로는 물을 못 뺀다며 한약으로 물을 말린다고 했다.
양약으로 먹으면 빨리 말릴 수 있는데, 38선이 막혀 있어서 연백으로 넘어가 서울이나 인천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 약을 사 오려면 한 달이 걸린다고 했다. 양의사가 한약 처방을 해 줘서 아버지가 하루 걸려 약을 지어오셨다. 한약을 달인 물에 물방개를 바싹 말려 빻은 가루를 섞어 먹으라고 하는데 냄새가 역해 코를 잡고 겨우 삼켰다. 의사가 인천에 주문한 양약은 한 달이 지나도 오지 않아 한약으로 한 달 분을 더 달여 먹었다. 그러고 나니 물이 다 말랐다며 집에 가도 좋다고 했다. 이튿날 소 달구지를 타고 간 지 석 달 만에 30리 길을 걸어서 집에 돌아왔다. 동네 어른들이 모두 나오셔서 환영의 박수를 쳐 주셨다.
치료받는 동안 병원 근처에 사시는 고모네 집에서 아버지가 석 달을 같이 계셨다. 다행히 농한기였다. 3일에 한 번씩 어머니가 다녀가셨는데, 하루가 다르게 좋아지는 모습을 보니까 30리 길을 힘든 줄도 모르고 기쁘게 다니셨다고 한다.
의사는 나를 돌려보내면서 3년 동안 달리기를 하거나 돼지고기를 먹으면 재발할 수 있으니 각별히 주의하라고 했다. 재발하면 다시 못 고친다고 신신당부하셨다. 이 당부가 내 삶을 어떻게 바꿀지 그때는 몰랐다. 병이 나아 집으로 돌아가는 것만으로도 나는 벅차게 기뻤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