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속으로 내던져지다
열세 살 되던 해, 6월 26일 38선 근처에 살던 아저씨댁 식구들이 찾아왔다. 전쟁이 나자 배를 타고 피신하려고 황소가 끄는 수레에 쌀가마랑 솥, 이불 등 한 짐 싣고 우리 집으로 온 것이었다. 그제야 전쟁이 난 걸 알고 우리 동네 사람들도 급히 바닷가에 나가보니 백사장에 수 천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뚫고 지나갈 틈이 없을 정도였다. 벌써 전쟁이 난 걸 아는 사람들은 배를 다 타고 나가고, 두 척만이 저만치 바다 위에 떠서 자기네 가족을 기다리느라 출발을 못하고 있었다. 젊은 사람들은 하나 둘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쳐서 배를 타러 갔다. 작은 배에 몇십 명이 탔으니 배가 곧 가라앉을 지경이었다. 배에 탄 사람들이 더 타면 우리도 죽고 당신들도 죽으니 제발 그만 오라고 사정하고 노를 저어 갔다. 그래도 재빠른 사람들은 배를 쫓아가서 타고야 말았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라도 배를 타려고 십 리 정도 북쪽으로 올라갔지만 거기도 배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도저히 피난 갈 방법이 없고, 여기 있다가 인민군이 오면 총에 맞아 죽을 수 있으니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집에 있으면 가만히 있는 농민들을 죽이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에 모두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엔 피난민이 더 많이 모여드는데 배는 한 척도 보이지 않았다. 배가 사람들을 싣고 수로로 삼십 리 떨어진 수압도로 갔으면 곧 되돌아와야 하는데, 3일이 지나도 돌아오는 배가 없었다.
얼마 후 또래 친구 넷이랑 봉화산에서 놀다가 내려오는데 전투기가 연평도 쪽에서 떼로 날아왔다. 해주 용당포에 폭탄을 2개씩 떨어뜨리고 지나가는데 솔나무 밑에 엎드려서 17대까지 세고는 포기했다. 얼마 후 조용해서 해를 쳐다보니 석양이 지고 있었다. 전투기가 또 날아올까 무서워 친구들과 정신없이 집으로 달려갔다. 이튿날 바닷가에서 놀다가 멱을 감으러 좀 더 깊은 물에 들어갔다가 시체를 보고 너무 놀라 도망쳐 왔다.
우리 동네에는 내 또래 아이가 네댓 명, 작은 형 또래가 네 명, 큰 형 또래가 두 명 있었다. 큰 형은 열아홉 살, 작은 형은 열여섯 살이니 소년단에 끌려갈 나이라 위험했다. 옆집 아저씨 집안사람이 수압도에 사는 부자였는데 큰 아이들을 섬으로 피신시키기 위해 배를 보내 주었다. 아버지가 밤에 형들에게 쌀 몇 말씩 등에 지워 배에 태워 보내고 오셨다. 나는 아직 어리고 학교에 다니지 않아 명단에 이름이 없어 나를 찾으러 올 걱정은 없었다. 하지만 나이에 비해 키가 큰 편이라 눈에 띄면 소년단으로 잡혀가기 알맞으니 아버지가 도망 다니라고 하셨다. 게다가 내 또래 아이가 길에서 소년단으로 잡혀간 일이 있었다. 함께 있던 누나는 울며불며 사정하다가 반동분자로 잡혀갈 뻔했다. 소년단에 끌려간 사람 중에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보지 못했다.
땅에 굴을 파고 있을 수도 없어 매일 멍게나무 아래로 가 숨어 지냈다. 백사장에서 육지 쪽으로 들어오다 보면 토사가 논으로 내려오지 못하게 나무를 심어 일년치기로 길렀었다. 여름이면 나무가 어른 키만큼 자라는데, 칠팔월에 베어 말려서 땔나무로 썼다. 잎사귀가 무성한 멍게나무 사이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으려고 먼 동이 트기 시작하면 밥 한 술 급히 먹고 나무 아래로 가서 하루 종일 숨어 있었다. 좁쌀 밭은 밭고랑이 깊어 어떨 땐 고랑 안에 엎드려 있기도 했다. 그렇게 세 달 가까이 숨어 살았다.
어느 날,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이 수복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드디어 나도 도망살이에서 해방되어 맘 놓고 다닐 수 있었다. 우리 군이 38선을 넘자 이제 곧 통일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