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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신 Nov 10. 2022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전신마비가 된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

 나는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한동안 고민해야 했다. 사고가 나고 마비가 됐다고 해서 그 모습 그대로를 잘 받아들이고 낯선 환경을 곧바로 받아들이게 되는 건 아니었다. 나는 오랜 시간을 방황했다. 병원을 나와 집에서 시간을 보내면서도 ‘이게 현실인가?’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예전에는 겉으로 나타난 내 모습으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가늠했다. 공부는 그리 잘하진 않았지만, 회사에서 성실했고 주위에서 인정도 받았다. 내가 무얼 얼마나 해낼 수 있느냐가 내 가치라고 생각했다.

 그런 내가 전신마비가 되면서 원래 할 수 있는 것들을 잃게 됐다. 걷는 것부터 시작해서 손으로 하는 모든 것들을...,  좋아하던 것들을 할 수 없게 됐다. 앉아 있는 시간보다 누워서 천장을 보는 시간이 더 많았다. 뭐든 하고 싶은 건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통해서만 해야 하는 것도, 펴지지 않는 뭉툭한 손가락으로 할 수 있는 것보다 없는 게 더 많다는 것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휠체어에 앉아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뿐이라 여겼다.

 내가 누구인지 스스로에게 묻는 물음에 아무 것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사람들이 나를 장애인으로 보면 그 사람이 잘못된 거라 판단했다. 잠시 휠체어를 탄 것 뿐이라고, 나는 이렇게 있을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누군지 이해하는 건 너무 어려웠다. ‘내게 이런 모습이 있었나?’ 할 정도로 비관적이었고, 분노가 많았다. 처음에는 내가 처한 상황에서 당연한 거라 여겼지만, 너무 오랜 시간 동안 계속됐다. 마음은 진짜 나를 마주하고 싶은데 현실은 나를 어떻게든 외면하고 싶었다.

 솔직한 내 모습을 보는 게 두려웠다. 고통은 일상을 무뎌지게 만들었고, 새로운 시도를 하기 조차 어렵게 만들었다. 이 모습이 어떠냐고 괜찮다 하다가도 금세 무기력해지고 말았다.    

  

 사람에게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능력이 주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_톨스토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몸은 살아있었지만, 마음은 죽음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병문안을 왔던 사람들의 눈빛을 기억한다. 그들은 누워있거나 휠체어에 앉은 나를, 위에서 내려 봤다. 그건 고개를 지그시 깔고 낮은 눈동자로 나를 보는 모습이었다. 마치 생사를 확인하는 사람들처럼 그 눈빛은 슬프면서도 체념한 것처럼 보였다. 왜 그리 내 장례식에 미리 온 사람들처럼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 건지, 화가 났다. 아마 상대는 그런 마음이 아니었을 것이다. 죽음의 길로 혼자 끌려가는 듯 한 두려움이 나를 그렇게 만든 건지 모르겠다.

 내 마음은 마치 살얼음 위에 서서 걸어가는 듯 위태했다. 언제 깨져 얼음물 속으로 빨려 들어갈지 몰라 불안했다. 희미한 가능성이라도 보였다면 고통은 덜어졌을까. 내 고통이 어디까지인지 안다면 편안해졌을까, 하지만 알 수 없었다.

 내게 현실과 미래가 사라졌다. 오직 과거만 존재할 뿐이었다. 그러나 과거에도 지금도 여전히 같은 나이다. 그런데 나는 자꾸 지금의 겉모습을 보고 과거의 나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었다. 눈물이 짓무르는 밤을 수없이 지새워도 결국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나를 보고 있었다.

 사람은 언젠가 다 죽는다면 그게 오늘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왜 내게만 이런 일이 일어났나, 왜 나만 불행하나?’ 아무리 질문을 해도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사람이 살다 보면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는 것 아니오. 마트료나! 그러니 마음을 좀 진정시키고 이 사람 처지를 한 번 생각해 보라고.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단 말이야. _톨스토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는 한 편의 동화 같은 이야기를 통해 사람의 마음속에는 사랑이 있고, 사랑을 베풀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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