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헤밍웨이
*작성일 : 2025년 1월 25일
고전은 시대를 초월한다.
이 책의 주된 내용은 노인이 바다 위에서 청새치를 잡아 마을로 돌아오는 이야기이다.
작가는 그가 바다로 나가 청새치를 잡고, 이를 노리는 상어 떼를 물리치며 마을로 돌아오는 일련의 이야기를 거침없이 서사한다. 마치 내가 그 배에 같이 탄 느낌을 줄 정도로 생동감이 있고, 어떤 때에는 내가 이 노인이 된 듯한 느낌도 받았다.
다만, 그 순간순간의 노인의 생각과 판단 그리고 주변 환경과의 관계를 보면, 이는 상당히 보편적이다. 어떤 사람이든 노인과 같이 자신의 업에 필사적으로 임하고, 주변 사람들 및 자연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으려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전의 핵심은 ‘무엇을 이야기하느냐’가 아닌 ‘어떻게 이야기하느냐’인 것 같다. 이야기의 소재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게 어부가 고기를 잡는 것이든 버스기사가 운전하는 것이든 말이다. 결국 읽는 모든 이가 그 이야기를 자신의 삶에 대입하여 공감할 수 있다면, 그 책은 고전의 반열에 올라설 수 있을 것이다.
젊은 어부들 가운데 몇몇, 낚싯줄에 찌 대신 부표를 사용하고 상어 간을 팔아 번 큰 돈으로 모터보트를 사들인 부류들은 바다를 ‘엘 마르’라고 남성형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들은 바다를 두고 경쟁자, 일터, 심지어 적대자인 것처럼 불렀다. 그러나 노인은 늘 바다를 여성으로 생각했으며, 큰 은혜를 베풀어 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는 무엇이라고 말했다. 설령 바다가 무섭게 굴거나 재앙을 끼치는 일이 있어도 그것은 바다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려니 생각했다. – 31 페이지
바다라는 자연에 대한 노인의 존중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여기서 젊은 어부들과 노인은 극명하게 대비된다. 젊은 어부들은 바다를 단지 돈벌이 수단이자 일터로만 생각한다. 어떤 공생 및 어울림이라는 키워드는 그들에게 와닿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바다를 조금 더 전투적이고 호전적인 남성형으로 부른다. 그러나 노인은 바라를 삶의 터전이자 사랑의 대상으로 바라본다. 바다는 본인에게 베풀어 주기도 하고, 종종 화를 내기도 한다. 가끔은 무섭게 호통을 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바다의 특징도 포용해 주기에 그는 바다를 여성형으로 표현한다.
라틴계열 언어에서는 명사에 성이 있다. 내가 전공한 프랑스어에서도 바다는 여성이고 건물은 남성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명사들만의 자연적, 종교적 의미들에 맞게 그 성이 부여된 것 같기도 하다.
태풍의 이름도 대부분 자의 이름이 붙는다. 이는 태풍에게 온화한 느낌을 불어넣어, 그 강도와 세기가 약해지길 기원하며 생긴 관습이다. 물론 남성은 폭력적, 여성은 포용적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이러한 문법적 성은 여러 문화와 그 속의 언어에 크고 작게 묻어나 있는 듯하다.
물속의 고기 놈한테도 먹을 것을 좀 줬으면 좋겠는데, 하고 그는 생각했다. 저 놈하고 난 형제니까. 하지만 나는 저놈을 꼭 죽여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힘이 빠지면 안 돼. 천천히 그리고 열심히 그는 쐐기 모양의 생선 조각을 모두 먹어 치웠다. – 60 페이지
노인의 바다와 자연에 대한 생각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자신의 사냥 목표이자 생계 목적인 먹잇감에 대해서, 어느 정도 연민과 동질감을 느끼며 이를 대하고 있다. 당장 잡아서 어떻게 빨리 팔아치울까를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어부의 심리라면, 그는 그가 필사적으로 잡으려고 하는 이 생선을 평행선 상의 전우이자 형제로 인식하고 접근하다. 물론 죽여야 할 대상이지만, 그 대하는 태도는 상당히 정중하면서 배려심 있다.
“정신 차려야 해.” 그는 이물 쪽 널빤지에 몸을 기대면서 말했다. “난 지쳐 버린 늙은이야. 하지만 난 내 형제인 이 고기를 죽였고, 이제부터는 노예처럼 더러운 노동을 시작해야 한다.” – 96 페이지
고기를 사냥하고 죽이는 행위까지는 나름의 신성함과 상대에 대한 존중이 있었다. 그러나 그 죽은 시체를 항구로 가져가고 파는 행위는 그에게 있어 너무 인간적이고 세속적이다. 따라서 그는 그 행위를 노예처럼 더러운 노동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상어는 우연히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먹구름 같은 시꺼먼 피가 1킬로미터 반쯤 되는 깊은 바닷속으로 조용히 퍼져 나갔을 때부터 상어는 이미 심연에서 위쪽으로 올라왔던 것이다. 상어는 무섭게도 빨리, 아무런 거리낌 없이 올라와 푸른 수면을 가르고 햇살 속에 몸을 드러냈다. 그런 뒤에 다시 바닷속으로 들어가 피 냄새를 맡으며 배와 고기가 가고 있던 항로를 따라 헤엄치기 시작했다. – 101 페이지
첫 상어가 등장했다. 상어는 그가 잡은 고기를 노리며 그가 항구에 도착할 때까지 여러 번 등장하는 ‘적’이다. 노인은 갖은 모든 무기들을 이용해 필사적으로 상어들로부터 고기를 지키려 하지만, 결국 머리와 꼬리를 제외한 모든 부위는 상어들에 의해 뜯겨 나간다.
노인은 필사적으로 방어하는 한편, 빼앗긴 것에 대한 슬픔은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그는 바다라는 하나의 시스템 안에서 어부로써의 최선을 다한 것이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크게 연연하지 않는 듯한다. 결국 바다가 그에게 고기를 준 것처럼, 상어들에게도 먹이를 준 것이다. 단지 어부와 상어는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 것일 뿐이다.
이러한 태도는 바다와 그 안의 모든 생태계를 적대적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것 같다. 오늘 고기를 많이 잡는 것도, 내일 한 마리도 못 잡는 것도 모두 바다가 결정하는 것이고, 그 속에서 어부든, 해파리든, 군함새든, 청새치든, 상어든, 모두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다.
“바다는 엄청나게 넓고 배는 작으니 찾아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을 테지,” 노인이 말했다. 그는 자기 자신과 바다가 아닌, 이렇게 말 상대가 될 누군가가 있다는 게 얼마나 반가운지 새삼 느꼈다. “네가 보고 싶었단다. 그런데 넌 뭘 잡았니?” 노인이 물었다. – 125 페이지
노인은 자신을 따르는 마놀린을 아끼고 사랑한다. 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는 내내 마놀린과 함께 했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혼잣말을 던진다. 그는 이 어린이를 통해, 어부라는 직업의 자부심을 갖고 일에 대한 원동력도 느낀다. 따라서 둘은 서로에게 크게 의지하고 서로의 정신적 버팀목이 되어 준다. 이런 면에서 노인과 어린이는 나이만 다를 뿐이지 그 속성과 성질은 다르지 않다고 생각된다.
책을 읽으며 숫자와 비즈니스의 바닷속에서 허우적대기만 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반성하게 됐다.
왜 항상 당황하고 일희일비하나 생각해 보았더니,
나 또한 이 비즈니스라는 바다를 적대적으로 생각하고 경쟁자로만 삼았기 때문인 것 같다.
비즈니스는 무한한 바다와 같다.
오늘은 나에게 막대한 성과를 가져다줄 수도, 내일은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도 있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산티아고와 같이 84일째 허탕을 치더라도, 85일째로 다시 바다로 나가면 된다. 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