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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오베라는 남자

프레드릭 배크만

by 김민규

*작성일 : 2025년 1월 22일


츤데레라는 말이 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자주 쓰는 용어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겉으로는 엄격하거나 쌀쌀맞게 대하지만 사실 속마음은 상대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한 사람들을 주로 일컫는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앞에서 대놓고 친절한 것보다 뒤에서 잘 챙겨주는, 이러한 츤데레스러운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이 책의 주인공 오베 또한 바로 이러한 츤데레이다. 무뚝뚝하고 까칠한 말투와 행동으로 그를 처음 보는 이에게 다소 고집스럽고 차가운 노인으로 보이곤 하지만, 함께 어느 정도의 시간을 보내면 그가 내뿜는 은은한 따스함에 감동하고 만다.


사실 그가 살아온 인생, 겪었던 사랑과 이별 등을 알게 되면, 그는 그 어느 등장인물보다 따뜻하고 정 많은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새로운 사람을 겪을 때 있어, 표면적인 말투나 모습들도 중요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과 애정을 들여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을 들여다보면, 더욱 입체적이고 심도 깊게 그 사람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보고 싶어.” 그가 속삭였다. 아내가 죽은 지 6개월이 지났다. 하지만 오베는 하루에 두 번, 라디에이터에 손을 얹어 온도를 확인하며 집 전체를 점검했다. 그녀가 온도를 몰래 올렸을까 봐. – 55 페이지

소설의 시작하며 머릿속에 오베라는 주인공의 첫인상은 ‘고집불통 노인네’였다. 그러나 그가 사랑하는 아내와 사별하였고, 아직도 그녀를 잊지 못하고 있음을 알게 된 순간, 어떤 다른 사연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은 오베가 세상을 흑백으로 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색깔이었다. 그녀는 오베가 볼 수 있는 색깔의 전부였다. – 69 페이지

그의 아내가 그에게 있어 어떤 존재였는지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극 T였을 것 같은 오베에게 있어 사냐는 F의 세상을 알려주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연필로만 그려 놓은 오베라는 스케치북에 사냐라는 색깔이 입혀져 둘만이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나 또한 감성보단 논리가, 감정보단 이성이 앞서는 사람이다. 내 옷장에는 무채색의 옷들이 가득하며, 쇼핑할 때도 항상 그런 색깔들만 눈에 들어온다. 고등학생 때는 글보다는 숫자를 좋아했고, 대학생 때도 마케팅보다 회계를 사랑했다. 이런 나에게 있어 색깔과 같은 사람이 나타나 내가 모르는 다양한 색으로 나의 빈칸을 채워줬으면 좋겠다. 오베와 소냐의 이야기 나올 때마다 오베에게 이입하여 몰입한 것 같다.


그는 문법적으로 문제가 많은 이 조그만 자연재해를 미심쩍은 눈으로 주의 깊게 보았다. 세 살배기가 고개를 들고 만면에 활짝 미소를 띠었다. – 168 페이지

이 소설은 3인칭 시점에서 오베와 그 주변을 바라보며 서사하고 있지만, 여기엔 오베의 주관적 생각과 느낌이 많이 가미된다. 오베가 세 살배기 아이의 당돌함에 당황하는 장면인데, 이를 ‘자연재해’라고 표현하여, 그가 느낀 당혹스러움을 너무나도 직관적이며 흥미롭게 나타낸 것 같다.


그녀가 깔깔거리며 웃는 걸 듣고 샴페인 거품이 웃을 줄 안다면 저런 소리가 날 거라고 오베는 생각했다. – 179 페이지

샴페인 거품이 웃는다면 어떤 느낌일까? 그런 광경을 본 적도 없고 현실에서 일어날 수도 없지만, 뭔가 상상이 된다. ‘깔깔거리며 웃는다’는 표현은 꽤나 진부하며 특색이 없지만, 샴페인을 이용한 이 표현은 정말 참신하고 재미있다. 작가는 이런 비유 혹은 직유를 정말 많이 사용하는데, 이러한 기법들은 독자에게 하여금 독서의 지루함을 빼앗아 간다.


“최고의 남자는 잘못에서 태어난다고 했어요. 나중에는 한 번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을 경우보다 훨씬 더 나아진다고요.”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 207 페이지

소냐가 셰익스피어의 말을 빌려 오베가 한 잘못을 되려 감싸주는 말이다. 오베는 자신이 사실 군인이 아님을 고백하며 잘못을 고한다. 그러나 소냐는 잘못을 통해 최고의 남자가 태어난다며, 되려 그를 위로한다. 사과를 받아주는 그녀의 방식이 참으로 세련되었다고 생각한다. 내 여자가 나의 사과에 이렇게 응해준다면, 나는 그날 밤 밤새 잠실 아파트의 전세 값을 알아보고 있을 것이다.


“저 친구는 낚시는 하냐?” 마침내 그가 그녀를 보지 않은 채 투덜거렸다. “아닐걸요.” 소냐가 대답했다. “알았다. 그럼 배워야겠군.” 마침내 그는 그렇게 툴툴대고는 파이프를 입에 물고 거실로 사라졌다. – 214 페이지

오베보다 더 무뚝뚝한 소냐의 아버지의 결혼 승낙 멘트이다. 츤데레스러운 면은 마치 오베의 아버지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오베와 닮기도 했다. 스웨덴의 남자들이 우리나라 경상도 남자들과 같은 성향이 있나 싶다.


오베의 눈가가 살짝 반짝였다. 그는 뭔가 뭉클한 게 팔을 누르는 걸 느꼈다. 잠시 뒤 그는 고양이가 자기 머리를 그의 손바닥에 부드럽게 얹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240 페이지

이 소설에서의 고양이는 소냐의 환생이라고 생각한다. 오베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와 함께 생활하며, 소냐를 대신해 오베를 돌보는 느낌도 든다. 고양이의 행동과 상황별 눈빛은 그 상황에서 소냐가 충분히 했을 법한 수준이며 정도이다. 고양이가 있었기에 오베는 자살하지 않고 계속해서 삶을 이어 나갈 용기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이후 몇 달 동안 오베는 하얀 셔츠를 입은 남자들을 셀 수 없이 만났다. 온갖 관공서에 있는 하얀 셔츠들은 밝은 색깔의 목재로 만든 책상에 앉아 오베에게 별의별 이유를 갖다 대며 서류의 빈칸을 채우도록 지시하는 데 엄청난 시간을 써댔지만, 소냐가 회복하는 데 필요한 조처에 관해 이야기하는 데에는 전혀 시간을 쓰지 않았다. – 276 페이지

오베에게 있어 가장 적대시되는 존재는 ‘하얀 셔츠를 입은 남자들’이다. 그들은 그에게 보험사기를 치고, 재건축을 위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집을 빼앗고, 심지어 그의 친구 루네를 보호시설로 강제로 보내 버리려 했다. 따라서 그는 자연스럽게 화이트 셔츠의 남자들을 경계하고 경멸한다.


당분간 흰색 셔츠는 출근룩에서 제외시켜야겠다.


그리고 그는 다섯 단어로 된 말을 내뱉었다. 파르바네가 오베에게 들었던 가장 사랑스러운 칭찬이라고 언제까지나 기억하게 될 말을. “왜냐하면 당신은 완전히 멍청이는 아니니까.” – 323 페이지

아마 이 부분에서 모든 독자가 파르바네로 빙의해 상당한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주변인들에 대한 계속적인 까탈스러움과 차가움으로 치질대로 지쳐 있는 독자들에게 있어, 엄청난 쾌감과 감동을 선물하는 대목이다.


그래서 그는 세상 전체와 싸웠다. 그는 병원 직원과 싸웠고, 전문의와 싸웠고, 외과 과장과 싸웠다. 그는 하얀 셔츠의 사내들과 싸웠고, 점점 더 수가 늘어나는 통에 나중에는 이름만 간신히 기억할 수 있었던 시의회 의원들과 싸웠다. 이 경우에는 이런 보험 증서가, 저 경우에는 저런 보험 증서가 필요했다. – 354 페이지

그가 왜 외부 세계에 무뚝뚝하고 까칠하게 반응하는지에 대한 사연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소냐는 그의 전부였고, 그의 세상이었다. 그렇게 소중한 그녀인데, 그깟 종이 몇 장과 되지도 않는 이유들로 그녀를 지킬 수 없다고 하니, 오베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을 것이다. 소냐밖에 없는 오베에게 있어, 소냐를 지킬 수 없게 만드는 세상은 너무도 가혹했다. 소냐를 떠나보낸 후, 그는 그 원수 같은 세상에 환멸을 느끼고, 그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 버린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때가 올 때까지 늘 낙관적이다. 다른 사람과 무언가를 할 시간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대화를 나눌 시간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 387 페이지

인간관계에 있어 공감되는 말이다. 특히 언제든지 할 수 있다는 착각으로 인해, 소중한 사람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종종 아끼게 된다. 이 또한 그 누구도 허락하거나 보장하지 않는 낙관주의에 빠져 쓸데없는 여유를 부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생각이 들면 바로 실행해야 한다. 특히 사랑하는 말은 아무리 표해도 부족하고, 그 말을 할 시간이 충분하다는 생각은 아무리 부정적으로 생각해도 과하지 않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집에 들어가는 것과 같아요.” 소냐는 그렇게 말하곤 했다. “처음에는 새 물건들 전부와 사랑에 빠져요. 매일 아침마다 이 모든 게 자기 거라는 사실에 경탄하지요. 마치 누가 갑자기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와서 끔찍한 실수가 벌어졌다고, 사실 당신은 이런 훌륭한 곳에 살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말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벽은 빛 바래고 나무는 여기저기 쪼개져요. 그러면 집이 완벽해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불완전해서 사랑하기 시작해요. 온갖 구석진 곳과 갈라진 틈에 통달하게 되는 거죠. 바깥이 추울 때 열쇠가 자물쇠에 꽉 끼어버리는 상황을 피하는 법을 알아요. 발 디딜 때 어느 바닥 널이 살짝 휘는지 알고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지 않으면서 옷장 문을 여는 법도 정확하게 알죠. 집을 자기 집처럼 만드는 건 이런 작은 비밀들이에요.” – 410 페이지

연애 혹은 결혼 초기의 설렘 그리고 시간이 지나가면서 그 설렘이 은은한 애정으로 바뀌는 과정을 집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다.


연애도 결혼도 수순은 비슷하다. 처음에는 보이는 모든 것들이 새롭고, 내 것이지만 더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 안달이 난다. 상대방은 무결점의 신으로 보이고, 모든 부분이 완벽해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사람의 단점과 불완전성이 보이기 시작한다. 단점을 숨겼다고 생각해 실망하기도 하고, 권태로움이 찾아와 단점이 장점보다 더 커 보이기도 한다. 누구는 이에 실망하고, 다른 누구는 이를 고쳐 예전의 완벽함을 찾고자 한다.


그러나 사랑은 처음의 설렘만으로 지속되지는 않는다. 처음의 설렘으로 인해 보이지 않았던 그 사람의 부족한 부분과 나만 아는 상대의 허점을 발견하고 이를 같이 채워 나갈 때, 그 사랑은 진정으로 영속성을 갖게 된다.


연애는 많이 해봤지만 아직 결혼을 해보지 못한 입장에서 장기간 한 사람과 사랑을 이어 나간다는 것에 막연한 의문이 들곤 했다. 정으로 혹은 자식으로 인해 사랑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부부관계를 유지한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저자는 인생의 배우자를, 세상으로부터 나를 지켜주는, 나만이 고칠 수 있는 귀여운 하자가 있는 집으로 비유하여, 나에게 있어 결혼에 대한 기대와 지긋한 사랑의 의미를 잘 전해주었다.




시회가 점점 각박해지고 상대방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려는 냉정한 배려로 인해,

사람과 사람 간의 거리가 계속적으로 멀어지는 것 같다.


나 또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것을 좋아하지만,

상대방이 행여나 싫어할까 봐 보고 싶다거나 만나자는 말을 잘 꺼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인간은 태생적으로 외로운 존재이고, 자신이 보고 싶다는 말에 경멸하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자신 있게 상대방에 대한 사랑과 애정을 표현하고, 그 감정을 온몸으로 전달해야 한다.


보고 싶다고 하고, 만나면 감격에 찬 표정으로 과감하게 안아주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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