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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파친코 1

이민진

by 김민규

*작성일 : 2025년 3월 23일


최근 들어 고전이 조금씩 지루해지고 있었다.

그래도 나만의 독서 철학인 ‘독파’를 지키기 위해 억지로 책을 붙들고 있었고,

덕분에 갓난아기 마냥 10시 전에 잠들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어,

퇴근하고 무작정 강남 교보문고로 향했다.

요즘 다른 사람들은 무슨 책을 읽나 싶었고, 어떤 책이 잘 팔리나 궁금하기도 했다.

베스트셀러의 장르별 인기책들을 한 권씩 살펴보니, 그간의 독서 권태가 말끔히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특히 소설 코너에 여러 책들이 있었는데, 파칭코라는 책의 표지가 유독 눈에 띄었다.

‘어, 이거 드라마로 나오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들며, 책 뒷부분을 읽어보았다.

예전에 인천공항 면세 서점에서 어머니가 이 소설이 재밌다고 한 기억도 함께 스쳐 지나갔다.

결국 1편을 읽어보고 다음 편을 살지 말지 결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야기 속 배경은 일제강점기이며 전쟁이 거의 마무리되는 시점이다.

영도라는 섬에 하숙집을 운영하는 훈이네 가족에서 스토리는 시작된다.

훈이는 몸이 조금 불편하지만 성실한 일꾼이다. 옆 동네 막내딸 양진과 결혼하여 선자라는 딸을 낳는다.

세 가족은 하숙집을 열심히 운영하며 그 힘들었던 시절을 잘 버티며 살아간다.


당시는 먹고살기가 너무 힘들어서, 있는 집에 딸을 시집보내 딸의 먹고살 걱정도 덜고,

덤으로 예물도 받곤 했다. 정말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이다.

왜 우리나라 사람들이 ‘식사하셨어요?”를 인사말로 입에 달고 사는지 알 것 같다.


소설 속 인상 깊었던 인물들을 소개한다.


한수

일단 한수라는 상당히 오묘한 인물이 등장한다. 처음에는 순진한 선자를 꼬셔 육체적인 관계만을 요구하는 파렴치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설의 막바지로 갈수록, 엄청난 정보력과 자본력으로 극 중 모든 인물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다.


참… 먹고사는 게 뭐라고, 선자는 자신을 임신시키고 버린 한수를 외면할 수가 없다. 한수가 있어야 세상 정보도 알 수 있고, 피난처도 제공받을 수 있다. 아들 노아와 모자수의 교육은 결국 한수의 조력이 없이는 한계가 있다.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는 선자는, 이제 더 이상 여자가 아니다. 그녀는 가장이자 어머니로서, 한수와 함께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요셉

다음은 요셉이다. 성실하고 책임감이 넘치는 인물로, 오사카의 본인 가족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사상이 조금 보수적이다. 일단 여자가 일을 하는 것에 상당히 부정적이다. 선자가 자신의 시계를 팔아 요셉의 빚을 갚았을 때, 그는 엄청난 분노를 표출했다. 나 같았으면 매우 감사할 것 같은데, 요셉은 사뭇 자존심 상해하는 모습도 보인다.




요셉은 일본이 쳐들어오기 전에 얼마나 살기 좋았는지 생생히 기억했다.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됐을 때 요셉은 열 살이었다. 그렇지만 큰형 사무엘이 그토록 용감하게 한 일을 자신은 할 수 없었다. 큰 형은 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결국 순교자가 됐다. 독립운동은 가족이 없는 젊은이나 하는 것이었다. – 174 페이지

이 소설은 전쟁과 일제강점기 시절의 고단한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가축들과 한 공간에서 살고, 청결한 상태를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먹고사는 것 이외에는 다른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 꿈? 장래희망? 교육? 이런 것들은 있는 집에서나 고민해 볼 수 있다. 일단 당장 다음 끼니를 먹을 수 있을지가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독립운동은 상당히 위험하면서 모험적일 수 있을 것이다. 훗날 역사를 배우는 입장에서는, ‘왜 독립운동 안 함?’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시대로 들어가면 ‘과연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 독립운동을 하다 걸리면,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까지 모두 죽임을 당할 수 있다. 내 가족의 생존을 나라의 독립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가? 아무도 쉽게 대답할 수 없을 문제이다. 따라서 요셉의 이러한 생각에 공감이 갔다.


“안 사고 싶다 해도 괜찮습니더.” 선자는 조용히 말하고 나가려고 몸을 돌렸다. 전당포 주인이 한 손을 들어 기다리라는 신호를 하고는 금고를 보관하는 뒷방으로 갔다. – 220 페이지

통쾌하면서 재미있던 대목이라 가져왔다. 집안일밖에 모르던 선자가 밖으로 나가 전당포 주인과 호기롭게 네고하여 원하는 바를 얻어내는 장면이다. 소설 내내 선자는 피해자이며 약자에 속했었다. 항상 남의 도움이 필요했고, 보는 내내 안쓰러운 마음이 쌓여갔다. 그러나 이 에피소드를 통해 작가는 독자에게 하여금 그러한 불편한 마음을 한방에 해결해 주었다. 드라마에서도 상당히 재미있게 각색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다코는 늙은 여자를 멀리까지 데려다줄 필요가 없었다. 양진은 넓고 어두운 밭에서 허리를 숙이고 있는 딸을 발견하자마자 긴 치맛자락을 잡아 올려 몸에 두르고 딸이 있는 쪽으로 힘껏 달려갔다. – 329 페이지

이 소설 중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 아닐까 싶다. 딸의 안위를 위해 아무런 연줄도 없는 타국으로 딸을 보내는 어머니의 심정은 정말이지 찢어졌을 것이다. 선자 또한 유일한 혈육인 어머니를 두고 말도 안 통하는 일본으로 넘어가는 마음이 굉장히 힘들었을 것이다. 결국 둘은 악착같이 살며, 다시 만날 순간을 기다렸을 것이다. 아니, 다시 만나기 위해 악착같이 살아 냈을 것이다. 전쟁과 식민지배는 다시는 일어나면 안 되는 비극이다.


“하지만 창호 씨가 방금 말했듯이 우리는 서로 싸우고 있잖아요. 꼭 할머니 둘이 말다툼을 하는데 마을 사람들이 상대방의 못된 점을 할머니들 귀에 대고 계속 속삭이면서 부추기고 있는 것 같아요. 할머니들이 화해하고 싶다면 다른 모든 사람들 말은 무시하고 두 사람이 한때 친구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데.” – 372 페이지

전쟁과 강점은 끝났지만, 냉전이라는 더 무서운 놈이 찾아왔다. 남한은 미국이, 북한은 소련의 치하 하에 결국 각각 별도 정부를 세우게 된다. 이를 막기 위해 많은 인물들이 노력했지만, 결국 분단의 결과를 가져왔다. 경희는 이러한 안타까운 상황을 할머니들의 싸움에 빗대어 말하고 있다. 경희의 생각을 풀어내자면, 우리는 그 어느 색깔도 없는 한반도일 뿐인데 왜 자꾸 빨간색인지 파란색인지를 나누려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이다. 창호는 웃으며 ‘경희 씨를 국회로!’라고 말한다.




과감하게 다른 책을 선택하길 정말 잘했다.


소설 읽기의 흥미가 다시금 솟아났고, 빨리 2권을 일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시간이 된다면 드라마 버전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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