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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by 김민규

*작성일 : 2025년 3월 30일


우리나라는 유교 바탕의 국가로,

가벼운 사랑은 저속하며 도덕적이지 못하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


반면 지고지순한 사랑, 일편단심의 사랑은 고결하고 가치 있게 여겨진다.

망부석 설화나 춘향전은 역사적으로 항상 베스트셀러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소설은 가벼운 사랑과 무거운 사랑을 흑백 논리로 바라보지 않는다.

작가는 비록 가벼운 사랑이 나빠 보일 수 있지만,

인간이라는 존재는 가벼운 사랑에 있어 참을 수 없이 끌릴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내가 해온 사랑은 어떤 사랑이었을까?

나는 사랑의 경중에 있어 참을 수 있는 존재일까?




토마시와 사비나 = 가벼운 사랑

이들은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로, 방랑자적 사랑을 추구한다. 제도와 규범 내에 있는 일부일처의 사랑은 이들과는 맞지 않는다. 이는 정신적 사랑과 육체적 사랑의 엄격한 분리로 이어진다. 토마시의 경우 많은 여자와 섹스를 하지만 절대 그녀들을 자신의 집에 들이지는 않는다. 또한, 여성과 한 침대에서 자는 경우도 없다. 사비나는 애인이 정부와 이혼했다는 사실이 전혀 달갑게 들리지 않으며, 반대로 그에 대한 경멸을 느낀다. 결속과 안정이라는 무거운 테마는 이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발목에 족쇄를 채울 뿐이다.


테레자와 프란츠 = 무거운 사랑

이들은 토마시/사비나 조합과 완벽하게 대칭되는 조합이다. 지순하고 안정적인 사랑과 결혼, 이것이 이들이 바라는 사랑의 방식이다. 테레자는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어 아무 계획도 없이 그 남자만을 믿고 프라하로 와버렸고, 프란츠는 사비나와의 영원한 사랑을 꿈꾸며 자신의 정식 부인에게 이혼 통보를 한다. 이들에게 있어 이러한 일편단심의 마음은 그들의 사랑에 안정감을 불어넣어 주기에, 상대방의 가벼운 사랑에 큰 실망과 환멸을 느끼게 된다. ‘왜 계속 떠나려고만 하지?’, ‘왜 나만 바라볼 수는 없는 거지?’라는 생각이 계속해서 이들을 옭아매는 것이다.




도무지 비교할 길이 없으니 어느 쪽 결정이 좋을지 확인할 길도 없다. 모든 것이 일순간, 난생처음으로, 준비도 없이 닥친 것이다. 마치 한 번도 리허설을 하지 않고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그런데 인생의 첫 번째 리허설이 인생 그 자체라면 인생에는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기에 삶은 항상 밑그림 같은 것이다. 그런데 ‘밑그림’이라는 용어도 정확하지 않은 것이, 밑그림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한 초안, 한 작품의 준비 작업인데 비해, 우리 인생이라는 밑그림은 완성작 없는 초안, 무용한 밑그림이다. – 17 페이지

인생은 리허설도 없으며 ‘Ctrl+Z’도 존재하지 않는다. 항상 실전의 상황에서 선택을 하고, 그 선택과 결과의 연속이 바로 인생이다. 물론 살다 보면 비슷한 결정의 순간이 왔을 때 예전의 선택과 그에 대한 결과를 반성하며 더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겠지만, 그 본원의 선택은 여전히 바뀌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밑그림은 연필로 그린다. 지울 수 있다는 편한 마음이 더 새롭고 도전적인 초안을 그릴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나의 인생은 바로 물감부터 칠해지기에, 항상 더 조심스럽고 다소 보수적인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다.


한번뿐이라 정말 신중해야 하고 소중하지만, 반대로 한번뿐이기에 큰 의미를 둘 필요 없이 더 과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는 이 체험을 프랑스 친구들에게 들려주었다. 그들은 깜짝 놀랐다. “점령당한 너의 나라를 위해 투쟁하고 싶지 않다는 소리야?” 그녀는 공산주의, 파시즘, 모든 점령, 모든 침공은 보다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어떤 악을 은폐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이 악의 이미지는 팔을 치켜들고 입을 맞춰 똑같은 단어를 외치며 행진하는 사람들의 대열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들에게 이런 것을 설명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어색해하며 말을 딴 데로 돌렸다. – 169 페이지

사비나의 가벼움이 체제와 대열이라는 무거움과 대치되는 대목이다. 국가의 해방이라는 대의에는 큰 이견이 없지만, 이를 구성하는 여러 규정과 도구들이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무겁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굳이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팔을 치켜들고, 같은 리듬에 맞게 정해진 구호를 외쳐야만 하는가? 방식 자체에 대한 회의를 느끼는 것이 아닌가 싶다.


토마시는 영혼의 순수함을 변호하는 공산주의자들이 악쓰는 소리를 들으며 이렇게 생각했다. 당신의 무지 탓에 이 나라는 향후 몇 세기 동안 자유를 상실했는데 자신이 결백하다고 소리칠 수 있나요? 자, 당신 주의를 돌아보셨나요? 참담함을 느끼지 않나요? 당신에게 그것을 돌아볼 눈이 없는지도 모르죠! 아직도 눈이 남아 있다면 그것을 뽑아 버리고 테베를 떠나시오! – 289 페이지

강압적 정치 치하에 맞선 지식인들의 선제적 반발은 모든 나라가 민주화 과정 속에 한 번쯤은 경험하는 반복의 역사이다. 체코슬로바키아 또한, 소련의 사회주의 강압에 맞서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자유와 민주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이는 1968년 프라하의 봄으로 이어진다.


토마시라는 지식인은 이러한 소련의 무차별적인 강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러 회유와 외압으로 인해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공표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다. 그는 결국 오이디푸스와 같이 눈이라는 의사 배지를 뽑아버리고 청소부로 여생을 살아간다. 무거운 정면 대결이 아닌, 사뭇 가볍게 느껴지는 회피의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자아’의 유일성은 다름 아닌 인간 존재가 상상하지 못하는 부분에 숨어 있다. 인간은 모든 존재에 있어서 동일한 것, 자신에게 공통적인 것만 상상할 수 있을 따름이다. 개별적 ‘자아’란 보편적인 것으로부터 구별되고 따라서 미리 짐작도 계산도 할 수 없으며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베일을 벗기고 발견하고 타인으로부터 쟁취해야만 하는 것이다. – 321 페이지

토마시의 가벼움의 원천을 설명해 주는 부분이다. 존재의 유일성은 예상과 상상의 영역 밖에 존재하고, 이를 도전하고 탐구하여 쟁취해야 진정한 자아를 성취하는 것이다. 예상, 상상, 보편은 무거움으로 설명될 수 있고 이는 토마시에게 있어 지루하기만 한 것들이다. 그는 항상 새로운 여자와 사랑을 갈구하고 찾아다니며, 가볍지만 신선한 그런 사랑을 원한다. 그는 이러한 참을 수 없는 가벼운 사랑을 통해 자아를 완성한다.


그러므로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가 미학적 이상으로 삼는 세계는, 똥이 부정되고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각자가 처신하는 세계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러한 미학적 이상은 키치라고 불린다. – 399 페이지

키치 (Kitsch)라는 독일어의 사전적 의미는 ‘1. 저속한 작품 2. 감상적인 통속물’이다.

<뮤지컬 엘리자벳> 속 키치라는 넘버 또한, 저속한 소문 혹은 찌라시 정도로 소개된다. 넘버 속 루케니는 엄청난 종이를 뿌려대며 엘리자벳 여왕의 더러운 사생활을 폭로한다.


그러나 작가가 말하는 키치는, 위 사전 혹은 뮤지컬에서 이야기하는 키치와는 정반대의 의미로 보인다. 똥이라는 가벼운 것을 부정하고, 확고부동한 동의를 이상으로 삼는다고 하니 말이다. 인간 삶의 가볍고 하찮은 것들을 일절 배제하고, 본질적 가치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것, 그것을 바로 키치라고 명명하는 것이다.




철학, 역사, 인문학 등 여러 테마 속 가벼움과 무거움을 다루는 상당히 ‘무거운’ 책으로 느껴진다.

따라서 다시 한번 읽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아이브의 키치를 들으면서,

마지막은 ‘가볍게’ 마무리하고 싶다.


우리만의 자유로운 nineteen's kitsch
지금까지 한 적 없는 custom f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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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추는 춤을 다들 따라 춰
매일 너의 알고리즘에 난 떠
걷잡을 수 없이 올라 미친 score
그 누구도 예상 못 할 nineteen's kits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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