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_서은국
*작성일 : 2024년 11월 30일
누군가에게 인생의 목표, 혹은 삶의 목적을 묻는다면 일반적으로 들을 수 있는 대답은 ‘행복’이다.
또한, 커리어 성공, 이상적 결혼, 한강이 보이는 고층 아파트, 고급 외제차는 모두 행복이라는 최종 삶의 목표를 위한 수단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그 최고 존엄의 대상, 행복은 무엇인가? 일단 이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알아보자.
1. 국어사전에서의 행복은 ‘복된 좋은 운수’로 검색된다.
2. 한자사전에서의 행복(幸福)은 ‘다행 행’자에 ‘복될 복’자의 합성어로, 참으로 다행스러운 운을 이야기한다.
3. 영어사전에서의 happy를 찾아보면, happy의 어원은 아이슬란드어 ‘happ’인데, 이 말은 ‘우연히 일어나는 것’. ‘운이 좋은 것’을 뜻한다. 여기서의 행복은 결국 행운과 유의어로 볼 수 있다.
결국 행복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인간의 능동적 사고 및 행위의 구체적인 목표라기 보다는, 생각치 못한 요행 및 행운을 뜻하는 듯하다.
그렇다고 하면, 인간의 모든 사고와 행동의 최종 목적지가, 수동적으로 일어나길 기도할 수밖에 없는 행운을 위한 것인가? 우리를 움직이고 생각하게 하는 원동력이 과연 이 추상적인 개념인지는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은 이렇게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삶의 목표이자 이유를 ‘행복’이라고 치부하는데 있어, 그 행복의 의미와 발생 과정 그리고 이 개념이 인간 삶의 목적이 될 수 있는지를 계속적으로 묻고 있다.
또한, 행복은 삶의 목적이 아닌 수단이며, 그 이유를 진화론적 관점에서 설명한다. 즉, 인간의 존재 목적은 ‘생존과 번식’에 있으며, 우리 몸은 이를 달성하고 유지할 때 최고의 희열과 쾌감을 느끼게끔 세팅되어 있고, 우리는 삶의 다양한 활동 속에서 이 희열과 쾌감을 느낄 때를 ‘행복하다’고 정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을 믿지 않는 나에게 있어, 이런 진화론에 바탕을 둔 고찰은 굉장히 큰 흥미를 유발했고,
이토록 빠르게 읽혀지는게 아쉬울 만큼 재밌게 페이지들을 넘겼다.
이성적 사고를 하는 것은 분명 인간의 탁월한 능력 중 하나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모습도 아니고, 그 역할이 생각만큼 절대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의식만이 우리의 눈에 보이기 때문에 생각이 자신의 행동과 결정을 항상 좌우한다고 착각한다. - 33페이지
의식적 사고와 행동만이 자신의 행동을 통제하고, 이것을 통해서만 자기 자신을 명확하게 파악할 있다는 일반적 사고를 비판하고 있다. 의식적인 사고와 행동에 앞서, 결국 인간은 동물이고, 생존과 번식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존재 이유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행동하고 이를 통해 행복이 방향이 정해진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공작새 꼬리가 이 책의 관심사는 아니다. 하지만 공작새 꼬리는 진화론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것은 ‘생명체가 가진 모든 생김새와 습성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생존과 짝짓기를 위한 도구’라는 점이다. – 61 페이지
가령 공작새의 인생에 있어 꼬리의 화려함이 무슨 의미일까 싶지만, 이는 생존과 번식이라는 가장 동물의 원초적인 목적에 맞게 진화된 최종 산물이다. ‘생존과 번식’이라는 동물의 진화론적 최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공작새는 자신의 꼬리를 계속적으로 가꾸어 왔으며, 이 아름다운 꼬리 가꾸기는 결국 공작새에게 ‘행복감’으로 느껴지게 된다. 즉, 여기서의 공작새의 행복이란 본인의 생존과 번식에 있어 필수적인 ‘수단’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행복해지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동물이다. 조금 더 냉정하게 표현하자면 인간은 생존 확률을 최대화하도록 설계된 ‘생물학적 기계’고, 행복은 이 청사진 안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 70 페이지
진화론적으로 봤을 때, 인간은 생존과 번식을 위해 태어나고 존재하는 것이지, 행복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님을 이야기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 생물학적 살아있음과 원활한 짝짓기를 위해 행복이라는 도구가 필요한 것이라고 부연하고 있다.
쾌와 불쾌의 감정은 나설 때와 물러설 때를 알려 주는 ‘생존 신호등’이다. 불쾌의 감정은 해로운 것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빨간 신호등’이다. 이 신호를 무시하면 몇 번은 운 좋게 살 수 있어도 결국에는 비극적인 종말을 맞는다. 쾌의 감정들은 ‘파란 신호등’이고 행복은 이런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생존에 유익한 활동이나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 일에 계속 매진하라고 알리는 것이 쾌의 본질적 기능인 것이다. – 83 페이지
인간의 생존과 번식은, 쾌와 불쾌를 통해 그 가능성이 변동한다. 즉, 쾌를 느낄 때 생존과 번식의 가능성이 높아지고, 반대로 불쾌를 느끼면 이는 떨어진다는 것이다. 계속 반복하고 있지만, 인간은 쾌를 통해 행복감을 느끼며 생존과 번식을 구현하고, 반대로 불쾌를 통해 불행복감을 느끼며 생존과 번식에 대한 위기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을 압축한다면 나는 “The ultimate SOCIAL machine”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사회성은 인간의 생사를 좌우하는 가장 독보적인 특성이다. 최근 여러 분야의 석학들이 이구동성으로 주장하는 결론이다. – 91 페이지
인간의 사회적 관계를 통해 사회적, 그리고 관계적 행복 또한 생존과 번식의 수단임을 강조한다. 원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은 자연에서 가장 나약한 존재로, 개인생활을 할 경우 생존 가능성이 현저히 떨어진다. 다만, 이들이 모여 집단 수렵을 시작하고, 더 나아가 농경을 시작하게 되면 이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된다. 결국 인간의 이러한 집단성과 사회성은 자신들을 자연에서 가장 강한 동물로 만들었으며, 그 집단에서의 소위 ‘잘 나가는’ 사회적 능력은 본인들의 생존에 직결되는 강점이다. 즉, 사회성 또한 생존과 번식을 위해 꼭 필요한 도구이며, 이를 잘 가공했을 때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행복은 복권 같은 큰 사건으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초콜릿 같은 소소한 즐거움의 가랑비에 젖는 것이다. 살면서 인생을 뒤집을 만한 드라마틱한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혹시 생겨도 초기의 기쁨은 복잡한 장기적 후유증들에 의해 상쇄되어 사라진다. – 116 페이지
행복의 의미를 공부했으니, 이제 행복이 가장 잘 느껴지는 조건을 살펴보는 대목이다. 이때 등장하는 개념이 ‘적응’이다. 인간은 적응하면서 이전의 행복을 잊고 또 다시 행복감을 느끼기 위해 사고하고 행동하여 더 길게 생존하고 더 많이 번식하게 된다. 즉, 인간은 계속적 생존과 번식을 위해 이 행복감에 빠르게 적응하게끔 설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1,000억을 버는 큰 행복이든 길을 걷다 클로버를 발견하는 행복이든, 그 행복에 대한 적응은 비슷한 속도로 찾아온다. 따라서 우리가 만일 계속적인 행복감을 갖고 싶다면, 지속적으로 계속 느낄 수 있는 행복, 즉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찾고 이를 계속 반복하면 된다.
정말 맞는 말이다. 나는 2023년 내가 대학생부터 선망하던 대기업 상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합격이 확정되고 전 직장 동료에게 하던 업무를 인수인계를 하는 순간까지, 나는 그 어느때보다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내가 일주일에 한번 먹는 교촌치킨 허니콤보를 먹을 때보다 100배는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었고, 그렇다면 이는 동일하게 100배 더 오래 지속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새 직장에 적응하면서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많이 생겼고, 결국 나는 생각보다 일찍 그 행복감을 상실하고 좌절했다. 결국 나도 그토록 큰 행복에 '적응'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안에서 더 많은 행복을 느끼기 위해, 열심히 일해서 인정받고, 적극적인 사회생활을 통해 인간관계를 구축했으며, 높아진 월급으로 더 많은 교촌치킨을 사 먹을 수 있었다. 결국 내 몸과 마음은, 나의 더 높은 생존 및 번식 가능성을 위해, 행복이라는 소프트웨어를 계속적으로 초기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향적인 사람들은 왜 외향적인 사람들만큼 타인과 어울리지 않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싫어서가 아니라 불편해서다, 사람이라는 자극은 양날의 검과 같다. 사람은 즐거움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때론 가장 큰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 그래서 계속 직장 상사만 보다 보면 휴가 생각이 간절히 나는 것이다. – 148 페이지
저자는 '외향성'이 행복에 필수 조건임을 이야기하지만, 그렇다고 내향적인 사람이 덜 행복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즉, 모든 사람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행복감을 느끼지만, 내향인은 외향인보다 불편한 인간 관계에서 오는 자극에 더 민감할 뿐이라는 것이다.
나의 MBTI는 ISTJ이다. 이 중 맨 앞의 스펠링인 I는 ‘Introverted’를 뜻하며, 내성적인 혹은 내향적인 성향을 의미한다. 하지만 나는 가족, 친구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회사 동료들과 함께 있을 땐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고 심지어 강한 소속감에 마음이 벅차 오르기도 한다. 이런 나를 되돌아볼 때, 일단 MBTI는 크게 믿을 만한 지표가 아니라고 생각되며, 사람과 집단을 좋아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생존을 위한 행복의 수단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 소개팅에서 MBTI는 그만 묻도록 하자.)
행복감을 예측하는 가장 중요한 문화적 특성은 개인주의다. 소득수준이 높은 북미나 유럽 국가들의 행복감이 높은 이유도, 사실은 상당 부분 돈 때문이 아니라 유복한 국가에서 피나는 개인주의적 문화 덕분이다. 그래서 개인주의적 성향을 통계적으로 제거하면, 국가 소득과 행복의 관계가 거의 소멸된다. 즉, 개인주의는 국가의 경제 수준과 행복을 이어주는 일종의 ‘접착제’역할을 한다. – 165 페이지
경제 지표가 높은 아시아권 국가들의 행복 지표는 OECD 국가들 사이에서 항상 뒤처진다. 이는 개인보다 집단을 우선시하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암묵적으로 무시하는 문화 때문이다. 가령 보수적인 문화를 가진 조직에서는, 집단이 개인보다 우선시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회식을 강요하거나 주말에 등산을 권유하는 것, 그리고 이러한 집단 행사의 참석률이 개인의 인사고과와 월급에 영향을 주는 사례들은 생각보다 우리 주변에서 많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집단은 결국 개인들로 구성되며, 집단의 행복은 개인들의 행복의 합이며, 경제 발전이 아닌 행복 발전이라는 미션에서는 결국 개인주의가 집단주의에 우선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물론 사회의 일원으로 살며 타인의 평가와 의견을 경청하고 존중하는 자세는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내 인생의 유일한 나침반이 되면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내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는 것보다 그에 대한 타인의 반응이 더 중요해진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삶을 경험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좋은 평가를 위해 살게 된다. – 171 페이지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의 ‘단힌 방’의 명대사 ‘타인은 지옥이다(L'enfer, c'est les autres)’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다. 사르트르는 위 표현을 통해, 가장 자유롭게 사고하며 행동해야 하는 인간이지만, 항상 타인의 존재와 시선을 의식하며 평생을 불행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비판하고 있다. 이는 특히 강한 집단주의를 가진 대한민국 사회에서 선명하게 나타난다. 우리 모두가 원하는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좋은 집, 좋은 차의 필요 목적이, 나의 행복이 아닌 타인의 부러움과 선망인 경우가 많다. 물론 타인으로 인해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행복감을 무시할 순 없지만, 이를 최대 선을 둘 경우 지속적 행복보다는 반복적 결핍으로 인한 불행감이 더 커질 것이다.
모호함보다는 황당한 설명이라도 듣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그래서 무리한 설명들이 만연했다. 하늘은 어떻게 우리 머리 위에 떠 있을까? 아틀라스가 하늘을 어깨에 떠메고 있다고 그리스인들은 말했다. 인간에 대한 설명도 비슷한 수준이었다. 정신적 문제를 설명할 때 자주 쓰인 조커 카드는 ‘악귀’였다. 치료는 이 몹쓸 기운을 몰아내는 것, 그래서 정신병 환자의 머리를 화로에 넣고 피자처럼 굽는 코미디 같은 장면이 여러 중세 그림에 등장한다. – 201 페이지
인간의 존재 자체를 단순화할 필요가 있음을 피력하는 대목이다. 우리 인간은 진화론적으로 동물부터 시작했고, 생존과 번식을 위해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사고와 행동에서, 어떠한 의미와 그 이유를 찾고자, 중세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비이성적 이론과 해법들은 되려 인간들을 행복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만들었다. 면죄부를 사지 못하면 지옥에 간다거나, 다수의 행복을 위해 여자를 모함해 화형 시키는 등 비인간적 행위들은, 결국 인간을 행복이라는 감정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자, 단순하게 생각하자. 생존과 번식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며, 그것을 행했을 때 느껴지는 감정과 쾌감, 그것이 바로 행복이고 그것만 따라가면 된다.
심리학은 이 둘이 철저히 한 덩어리임을 깨닫고 있는데, 여기엔 매우 중요한 함의가 담겨 있다. 신체 반응과 마찬가지로 감정과 같은 경험을 유발하는 원인이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외부 환경의 다양한 자연적, 물리적 자극이다. 하버드대학의 생물학자였던 에드워드 윌슨의 유명한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의 미적, 지적, 인지적, 그리고 심지어 영적 만족감까지, 그 열쇠를 쥔 것은 자연이다. – 205 페이지
행복은 생존과 번식이 가장 잘 이뤄질 때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다만, 이 생존과 번식이라는 단어가 상당히 물리적이며 세속적이라, 정신적 행복과는 괴리가 느껴질 수 있다. 다만, 우리가 정신적으로 느껴지는 감정적 혹은 정서적 행복 또한 자연적이며 물리적 자극에 기인한다. 우리의 뇌와 마음도 결국 외부의 어떠한 새로운 자극을 통해 변하고 반응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가 연쇄적으로 이어지면 더 깊은 감정으로 발전하고, 이게 궁극적인 행복과 불행복을 만드는 것이다. 결국, 몸과 마음은 모두 외부적인 환경과 자극을 통해 반응하고, 이는 생존과 번식의 연관 정도에 따라 행복과 불행복으로 느껴지게 된다.
행복(감정)이 도구라는 말은 이것이 어떤 목적(생존, 재생산)을 달성하는 데 쓰임새가 있다는 뜻이다. 이 도구는 ‘제대로’ 작동하는 것이 중요하다. 상황과 무관하게 무조건 활성화되는 것이 좋다는 뜻이 아니다. – 214 페이지
행복이 ‘생존 도구’라면, 행복할수록 무조건 좋다는 뜻이냐는 질문에 대한 저자의 답이다. 행복은 생존의 수단일 뿐이고, 그 수단으로 원활하게 기능하면 되는 것이지, 쉴 새 없이 행복해야 되는 것은 아니다. 생존과 관련 없는 상황에서도 행복을 느낀다면, 그것은 행복의 ‘오작동’이고, 이게 반복되면 ‘단명' 혹은 '단종’이라는 비극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행복이라는 생존 유지 장치가 잘 작동될 수 있게 이를 관리하고 점검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우선, 내향성은 외향성의 반대가 아니다. 찬물과 더운물 이 두 종류의 물이 아니듯, 외향성/내향성은 상반된 특징이 아니고 동일한 특질의 높고 낮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낮은 외향성’을 편의상 내향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 218 페이지
내향적인 사람이 더 불행하냐는 질문에 대한 저자의 대답이다. 결국 사람은 사회적 관계를 통해 행복감을 느끼는데, 그 관계에서 주는 자극에 반응하는 민감도에 따라 높은 외향성과 낮은 외향성이 갈린다. 결국 관계 자극을 받아드리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사람은 모두 자신이 받아드릴 수 있는 관계 자극 속에서는 절대적인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을 저자는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진화론적 사고에 따라 행복을 정의한다면, 인간은 생존과 자손 번식을 위해 존재하고, 우리의 몸과 마음은 이 목표를 가장 잘 달성하도록 설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 설정에 따라 생존과 번식할 때 상당히 큰 쾌감과 좋은 느낌을 받고, 우리는 이를 ‘행복’이라고 칭한다.
나는 언제 행복한가를 나열 후 그 최종 목적지가 생존과 번식인지 생각해보고, 그게 맞으면 조금 더 적극적인 자세로 이 책의 이야기를 받아드릴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생존과 번식에 전혀 문제가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인간은 그 이상의 더 큰 이상을 추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큰 이상을 이루었을 때 더 큰 행복감 또한 느낄 수 있다.
따라서 나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인간이 느끼는 행복은, 삶의 목표에 더 빠르고 확실하게 도달하기 위한 수단은 맞다.
다만, 그 목표가 꼭 생존과 번식에만 국한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생존과 번식이 원활하지 않을 경우, 이를 목표로 행복 항로가 세팅 되겠지만,
이것을 모두 이룩한 이에게는, 더 고차원적인 목표로 가기 위한 새로운 행복 항로가 세팅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