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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슬픔이여 안녕

프랑수아즈 사강

by 김민규

*작성일 : 2025년 8월 4일


또 사강 책을 선택했다.

사강이 다루는 사랑 이야기 그리고 그 문체가 나에게 왠지 모를 위로를 주는 느낌이다.

반대로 항상 의무와 책임이라는 울타리에 갇힌 내게 일시적인 해방감을 선사해 주는 것 같기도 하다.


또한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화를 전공한 입장에서,

파리와 프랑스의 색채가 가득 담긴 작품들을 볼 때면

뭔가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 들어 기분이 좋다.




나는 그녀의 말이 맞다고, 나는 주체적인 인간이 아니라 한 마리 짐승처럼 다른 사람들이 이끄는 대로 살아온 딱하고 나약하 존재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런 나 자신을 경멸했는데, 그런 감정에 익숙지 않았기 때문에 극도로 고통스러웠다. 그때까지는 좋게든 나쁘게든 그런 식으로 나를 판단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 39 페이지

이 소설은 세실의, 혹은 사강 자신의 성장기를 다룬 소설, 즉 자전적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사강의 유년시절이 마치 세실의 삶과 비슷하게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세실은 보름 간의 별장에서의 휴가기간 동안 다양한 사랑의 종류를 직, 간접적으로 경험하며 그곳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감정을 배우고 학습한다. 특히 자기가 존경하고 선망하던 안의 말에 크게 반응하며 분노, 창피함 그리고 슬픔을 겪고 이를 받아들이는 방법을 익힌다.


감정을 느끼고 이를 묘사함에 있어 상당히 사실적이면서 세밀하다. 가장 감성이 풍만하고 예민한 청소년 여자 아이의 생각과 심정을 정말 잘 표현한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세실의 1인칭을 따라가다 보면 나의 어린 시절은 참으로 투박하게 묘사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망연자실한 채 그 자리에서 못 받힌 듯 움직일 수 없었다. 안의 말은 진심이었다. 내 논리, 내 부인에 그녀는 경멸보다 더 지독한 형태의 무관심으로 대응했다. 마치 내 존재가 없는 것처럼, 그녀가 줄곧 알아왔던 나 세실이 아니라 진압해야 할 그 무엇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그녀가 그런 식으로 처벌해 마땅한 대상인 것처럼. – 60 페이지

세실의 위험한 행동에 대해 안은 책임감 있고 단호한 ‘진짜’ 어머니의 태도로 그녀를 훈육한다. 이에 대한 세실의 참담한 심정이 참으로 서정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가져온 대목이다. 이는 기존에 세실이 안에 대해 가진 선망 및 경외감으로 인해, 그 반응이 더 격해진 것 같다. 원래 존경하고 좋아하는 사람한테 혼나면 더 마음이 쓰라린 법이다. 다만, 이는 성장으로 이어지는 지름길이니 너무 슬퍼하지 말기를.


안이 나타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녀는 숲 쪽으로 오고 있었다. 팔꿈치를 몸에 붙인 채 서툴고 어색하게 달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문득 어떤 늙은 여자가 달리고 있고,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다는 생뚱맞은 생각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나는 너무 놀라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는 건물 뒤에 있는 차고 쪽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제야 나는 불현듯 사태를 깨달았다. 안을 붙잡기 위해 나 역시 달리기 시작했다. – 139 페이지

레몽의 외도 장면을 목격한 안이 이성을 잃고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는 부분이다. 바람둥이인지 몰랐나 싶지만, 그 외도의 장면을 직접 목격했기에, 그 침착하고 이성적인 안도 돌아버릴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나름 이 소설에서 전개가 빨라지고, 복선의 향기가 짖게 나는 대목이라 인용하였다. ‘곧 누군가가 죽겠구나… 레몽이든 안이든 사고가 나겠어…’ 하며 읽었던 것 같다.


다만 파리 시내를 달리는 자동차의 소음만이 들려오는 새벽녘 침대에 누워 있을 때면 때때로 내 기억이 나를 배신한다. 그해 여름과 그때의 추억이 고스란히 다시 떠오르는 것이다. 안, 안! 나는 어둠 속에서 아주 나직하게 아주 오랫동안 그 이름을 부른다. 그러면 내 안에서 무엇인가가 솟아오른다. 나는 두 눈을 감은 채 이름을 불러 그것을 맞이며 인사를 건넨다. 슬픔이여 안녕. – 150 페이지

창피하지만 한 가지 고백하자면, 나는 소설을 다 읽을 때까지 이 책의 제목을 오해하고 있었다. 주인공이 미성숙에서 성숙으로 성장하며 더 이상 슬픔을 어리숙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되려 슬픔을 떠나보내는 아주 행복한 결말로 착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 대목을 보고 뭔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제목의 원어를 다시 찾아보았다.


‘Bonjour Tristesse’였던 것이다. ‘Au revoir Tristesse’가 아니라! 즉, 슬픈 감정이 찾아와 이를 맞이하는 말이지, 슬픔을 극복하는 의미가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세실이라는 유년기 여자 아이가 안의 사건을 통해 진정으로 슬픔을 느끼게 되는 과정을 서정적이고 면밀하게 묘사하는 그런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그 일련의 비극을 경험하고 심지어 자책하며 비통하고 슬픈 감정을 배우고 이를 온전하게 느끼는 세실의 모습으로 소설을 마치며, 그 마지막 대사가 ‘슬픔이여 안녕’인 것이었다.

이렇다고 하면 번역본 제목을 ‘슬픔이여 안녕’보다는 ‘안녕 슬픔아?’가 더 직관적이고 명확하지 않나 싶다. 너무 간지가 안 나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패배의 신호’까지,

사강의 책을 세 권째 보고 있다.


사강의 생애와 생전 행보를 찾아보면,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급진적이고 제멋대로다.

한 마디로 ‘문제아’스럽다.


이러한 문체와 이야기가 나오려면 어쩔 수 없나 싶기도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다 떠나서 지금 나에게 큰 행복과 위로를 준다는 점에서,

참으로 고마운 작가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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