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 마지막 주말
아이와 함께하는 마지막 주말이 벌써 저물고 있다.
토요일에는 근처 쇼핑몰에 가서 오랜만에 딸들과 셋이서 오붓하게 아이스크림도 먹고 올리브영에서 간단하게 화장품 쇼핑도 하고 셀카도 찍었다. 이런 소소한 일상의 소중함에 문득 노을이 시리다. 올리브영 쇼핑을 하는 동안 잠시 와인샵에 들러 와인 두 병을 장바구니에 담아서 나오는데 큰 딸이 조용히 제 손으로 가져가서 올리브영에서 산 화장품 몇 개도 집어넣더니 걷는 내내 들고 다닌다. 헤어짐을 앞둔 우리는 서로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을 주려고 보이지 않게 애쓰고 있지만 너무나 또렷해서 시선을 떨구게 된다.
명절선물로 받아서 냉동실에 모셔뒀던 한우를 꺼내서 해동을 하고 하얀 순도 100% 백미밥을 고슬고슬하게 앉혔다. 샐러드 야채에 구운 야채 곁들여서 온 가족이 둘러앉았다. 큰딸은 학교에서 미리 내 준 숙제라며 밥상 한쪽에서 조용히 고개 숙이고 문제를 풀면서 밥을 먹는다. 며칠 전부터 부쩍 말수가 줄어들었다. 덤덤하려고 해도 출국일이 다가오면 걱정되고 무섭겠지... 애써 티 안 내려는 모습이 더 안쓰럽다. 무겁지만 무겁지 않으려고 그냥 여느 때의 주말 저녁처럼 태연해지려고 일부러 와인도 꺼내고 텔레비전도 켰다. 오랜만에 켰더니 로그인할 수 있는 OTT가 딱히 없다. 빌려 쓰던 아이디마저 로그인이 풀려서 주저하고 있자 조용히 화면으로 가더니 넷플릭스 로그인을 한다. 큰 이모한테 계정을 받은 건데 한 번도 안 썼다고. 기다리던 접속에 다들 신이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예상밖의 상황에 당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떠나기 전 선물인가 싶기도 해서 또 마음이 가라앉는다.
일요일 오후,
빌린 책을 반납해야 해서 도서관을 가야 한다는 큰 딸, 면접 준비로 책 좀 읽으라는 잔소리 대상이던 둘째 딸을 데리고 온 가족이 도서관으로 향했다. 각자 흩어져서 책을 고르는데 큰 딸이 두리번거리고 있다.
"너도 골라."
"나 내일모레면 가잖아요..."
"괜찮아. 엄마가 반납할게."
대화가 끝나자 책을 가지러 돌아서는 큰 딸, 그리고는 몇 권을 안고 돌아온다. 비록 이틀밖에 남지 않았지만... 읽고 싶은 만큼 읽고 두고 가면 엄마가 반납할게. 그런데 늘 너랑 같이 오던 이 도서관에 혼자 반납하러 오면서 엄마는 또 네가 보고 싶어 울지도 모르겠다. 그건 좀 두려운데... 그래도 최대한 우리는 의젓한 주말을 보내고 있었다.
저녁은 둘째가 선택한 삼겹살 구이, 점심 찜닭에 치즈 듬뿍 얹어 오븐에 굽고 남편 원픽 백합탕 그리고 리코타샐러드이다. 아! 계란 스크램블을 추가했다. 아이는 엄마밥을 당분간 못 먹는다는 생각에서인지 매 끼니 정말 밀어 넣듯 최선을 다해서 먹는다는 표현보다 몸속으로 저장하고 있는 느낌이다. 특히 우리 집만의 메뉴인 다 갈다 갈(계란스크램블)은 식사가 다 끝났는데도 숟가락이 조용히 움직인다.
엄마밥을 유독 좋아하는 아이라 어려서부터 뭘 해줘도 "어때?"라고 물으면 오물거리며 "맛있어요."라고 대답하는 아이. 늘 똑같은 그 대답이 표정도 톤도 없어서 가끔은 너무 판에 박힌 대답이라 살짝 진심일까 싶기도 했는데 지나 보니 알겠다. 톤이 똑같아도, 미사여구가 붙지 않아도 감탄사가 빠져있어도 그 짧은 말에는 매 순간이 진심이었다는 것을.
저녁상을 치우고 자기 전 식탁에 앉아 잠깐 핸드폰으로 검색하다가 갑자기 덜컥 겁이 났다. 코벤트리 지도에 병원 위치를 보면서 갑자기 무서워졌고 내가 달려가기에 너무 먼 거리에 아이가 있다는 사실이 다시 실감이 되면서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고등학교 2년에 대학까지 그곳으로 진학하면 너무 긴 시간을 떨어져 있어야 하는데... 이제 시작인데... 내가 어쩌자고 이런 일을 시작하게 된 걸까...
갑자기 아이가 너무 보고 싶어서 아이방으로 갔다.
영문을 모르는 아이를 끌어안고 울지 않으려 참았는데 결국 눈물이 났다.
아이의 등을 쓰다듬고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면서 최대한 내 가슴과 손으로 기억하려고 애썼다. 이제 이렇게 안고 싶어도 안을 수 없을 때 이 느낌을 기억해내야 하니까.
"너는 엄마 최고의 보물인 거 알지? 엄마가 매일매일 많이 보고 싶을 거야. 엄마는 네가 뭘 먹고 뭘 보고 있고 뭘 하고 있는지 매 순간이 너무 궁금하니까 꼭 자주 연락해서 알려줘."
울먹이면서 이야기하는데 아이는 덤덤하게 나를 더 끌어안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넌 안 슬퍼?"
"내가 울면 엄마가 더 슬프잖아요. 내가 씩씩하게 설레게 가야 엄마 아빠와의 헤어짐이 덜 슬플 것 같아서요. "
"너도 감정을 담아두지 말고 표현을 해. 슬플 때는 같이 슬프고 기쁠 때는 같이 기쁠 수 있게"
"나는 화날 때 눈물이 나는데 슬플 때는 눈물이 안 나요."
믿어도 되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우는 엄마는 아이의 두툼한 고사리 손으로 토닥임을 받았다.
이 밤이 지나고 한밤 더 지나면 자기 키만 한 가방 두 개를 혼자 들고 17시간의 비행을 거쳐 지구반대편에서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아이...
시간이 부디 천천히 흘러주기를...
내 이쁜 아기 발자국 소리도 더 듣고 싶고 밥 먹으라고 불렀을 때 대답하는 목소리도 더 듣고 싶고 두툼한 고사리손도 더 잡고 싶고 뭐든 맛있다는 아이에게 엄마밥도 더 꾹꾹 눌러 담아 주고 싶고 엄마가 필요할 때 언제든 달려가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