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마음에는 주름지고 싶지 않아
영국에서의 마지막 조식. 점심을 못 먹을 예정이라 부지런히 풀코스로 먹고 체크아웃, 짐을 맡기고 지하철을 타러 갔다. 오늘은 각자의 일정으로 흩어지는 날.
카라바오컵을 보러 간 날, 내가 예약했지만 자리가 너무 좋았다. 딱 레프트윙 포지션이 바로 코앞에 보이는... 만약에 내 최애 선수가 출전하게 되면 이 자리에서 뛰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컵대회와는 다른 프리미어 리그 정규경기도 직관하고 싶었고. 그래서 그날 그 자리에서 바로 예매를 해버렸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자. 안되면 취소하지 뭐... 하는 나름의 쿨한 마음으로.
앱상으로 한 명만 예매가 가능한 데다 비행기 일정상 중간에 나와야 해서 내 표만 예약하고 둘째는 시내에서 자유시간을 갖기로! 그래서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중간에 둘째가 피카디리 서커스에서 내리고 나는 계속 킹스크로스역까지 타고 가는 계획이었다.
"엄마, 늦지 않게 와야 해요."
"엄마 절대 다 보고 일어나면 안돼요."
마음만 청춘인 중년의 엄마에게 잔소리와 협박에 최선을 다하고 내렸다.
괜찮다고 걱정 말라고 너도 재밌는 시간 보내라고 해놓고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걱정과 초조함이 밀려왔다. 검색을 해보니 낮 경기를 보고 저녁 비행기를 타는 건 불가능이라는 내용이 지배적이었다. 공항까지 제시간에 못 가면 어떡하지... 비행기를 놓치면 어떡하지... 택시를 탈까, 우버를 예약할까, 전반전만 볼까 등 여러 가지 고민을 하다가 결국 결론은 후반 20분 정도까지 본 후 나와서 지하철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지하철 시간표까지 미리 캡처하고 나가는 동선도 경기장 입장하면서 미리 확인하고 들어왔다.
밤경기와 낮경기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그리고 컵대회와 프리미어리그 공식경기의 분위기도 달랐다. 프리미어리그 경기는 훨씬 무겁고 긴장되고 격하게 흥분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놀라운 건 선수에게 말을 하는 팬들이었다. 그들은 선수들과 소통하려 하고 있었다. 단순히 영화를 보듯 앉아있는 게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원팀이었다. 선수들이 경기가 끝나고 팬들에게 감사인사를 건네는 게 단순히 형식적 멘트라고 생각했는데 그들은 관객들로부터 응원을 받고 상처도 받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공간이었다.
한국 투어 때 봤던 선수들이지만 실제 홈구장에서 볼 때와의 느낌은 또 달랐다. 매주 주말 경기를 보러 올 수 있는 영국인들은 참 좋겠다. 직관했던 두 경기가 모두 이겨서 기분 좋은 축제 분위기였지만 만약 진다면 참 많이 우울하겠구나... 그런 걸 생각하면 모니터로 보는 것도 나름 위안이 되기도. 경기 후반전 약 20여분을 남겨놓고 나왔다. 앞쪽 가운데 자리라 도저히 나갈 틈이 없어서 망설이다가 더는 늦으면 안 될 것 같기에 용기 내서 허리를 최대한 숙이고 빠르게 좌석을 지나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는데 함성소리가 두 번 들리는 걸로 봐서 누군가 골을 넣었나 보다 싶은데 옆에 지나가는 사람이 골이라고 웃으면서 말을 건다. 모르는 사람과도 축구 이야기로 충분히 교감할 수 있고 내 편이 되는 이곳의 분위기. 참 낯설지만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익숙히 준비한 대로 지하철역을 갈아타면서 공항으로 향했다. 그 사이 둘째에게서 계속 엄마의 위치를 확인하는 문자가 온다. 호텔 들러 짐 찾아서 택시 타고 공항에 미리 도착해서 짐 다 보내놓은 딸 덕분에 보낼 수화물이 없어서 체크인 데스크를 거치지 않고 모바일 티켓으로 바로 입장했다. 라운지에서 극적인 상봉을 하자마자 샤워실이 없다고 투덜대길래 설마... 하고 직원에게 물어보니 샤워실이 있고 예약하면 사용할 수 있단다. 청소년의 귀차니즘인지 자칭 I 성향의 반증인지... 아무튼 부랴부랴 샤워용품 챙겨서 밀어 넣고 간단히 요기를 하는데 벌써 탑승시간이다.
일단 먼저 탑승구로 갔는데 생각보다 게이트를 일찍 닫으려 해서 이젠 내가 둘째를 재촉하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 모녀는 비행기에 무사 탑승 완료!
큰딸과 같은 시차에서 통화할 수 있는 것만도 신기하고 감사했는데, 그렇게 비행기에서 마지막 통화를 했다. 최대한 담담하게. 겨울에 다시 만날 때까지 이 추억이 부디 딸에게도 내게도 힘이 되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