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차] 세 모녀의 가을여행

데려다주는 길과 데리고 가고 싶은 길

by 오후의콘파냐

아침 일찍 조식을 먹고(와플기계로 시나몬와플도 굽고) 체크카웃 후 캐리어를 끌고 역으로 향했다. 역까지는 도보 5분 거리. 객실 옷장에 코트를 걸어놓고 온 게 생각이 나서 아이들을 먼저 보내고 혼자 역으로 가는데 잠깐 길을 헤매느라 혹시 늦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너무 일찍 와버려서 코스타 커피를 사러 갈까 말까를 잠시 망설이게 만드는 사치스러운 고민이 끝나기 전에 결국 기차가 왔다.

기차 안은 좌석이 없는 탑승객들로 인해 그야말로 아수라였다. 내가 예약한 좌석에 누군가 버젓이 앉아있길래 미안한데 표 좀 확인해 줄 수 있을까? 했더니 그제야 쓱 일어나서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이미 통로는 서서 가는 사람들로 꽉 차서 오고 갈 수도 없고 좌석 위 선반도 통로 쪽 캐리어 선반도 가득이다. 우선 아이들을 앉혀놓고 좌석 아래에 작은 캐리어 눕혀서 넣고 큰 캐리어를 가지고 두리번거리다가 내 좌석이 마주 보는 4인석이라 슬쩍 아래를 보니 옆 아주머니가 눈치를 채고 무리라고 고개를 젓는다. 캐리어 선반으로 가서 보다가 다른 사람의 작은 캐리어를 위로 올려 테트리스하듯 공간을 만들어 겨우 집어넣었다. 혹시 몰라 자물쇠도 채우고. 옆에서 내내 지켜보던 입석 아저씨가 내가 스마트해 보였는지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나도 낼모레 50인데--) 일찌감치, 그것도 싼 가격에 기차표를 예매한 나를 스스로 칭찬하며 그렇게 버밍엄으로 향했다.


버밍엄역 물품보관소에 캐리어 두 개를 맡기고 쇼핑몰에 들러서 구경하다가 점심으로 우리 가족이 사랑하는 난도스에 가서 소스 몽땅 병풍처럼 세워두고 신나게 먹었다. 20년 전 호주에서 먹던 난도스를 아이들과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먹었고 그 난도스를 나보다 더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신기하기도 하고 같은 취향이 참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나름 우리의 결론은 치킨을 먹기 위해 난도스에 오는 게 아니라 소스를 먹기 위해 치킨을 시킨다는!

Nandos

마트에서 한국 가져갈 음식들을 사고 아이들이 짐을 찾으러 간 사이 아까 봤던 소시지를 못 잊어서 다시 왔다. 핫도그에 밀맥주를 시켜서 아이들을 기다리면서 먹다 보니 캐리어를 밀고 다시 나와야 하는 긴 동선에 아이들이 입이 나왔는데 참는 무서운 기운이 살짝 느껴졌다. 나는 나름 핫도그 나눠먹자고 부른 거였는데! 암튼 그렇게 다시 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코벤트리로 향했다. 작은 기차역에 내려 큰 딸이 부른 우버를 타고 기숙사로 향했다.

버밍엄에 와봤다며 앞장서서 길 안내를 하고 기차 티켓도 혼자 기계에 가서 사 오고 학교 근처 역에 내려서 우버 불러서(우버 비도 본인카드로 결제) 학교까지 데리고 오는 큰 딸을 보면서 놀랍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고... 그렇게 이 날은 큰 딸의 뒷모습만 보며 따라다녔다.


벌써 시작된 크리스마스 마켓


여행 캐리어에서 큰딸 짐을 빼고 한국 가져갈 가방 챙기고 주방에 가서 큰딸이 만들어 달라고 한 나물(아껴먹느라 일주일 동안 먹어서 탈 날까 걱정했다는), 야채밥(친구들과 나눠먹느라 한 끼에 다 먹어서 슬펐다고) 해주고 나름 기쁨조 둘째는 분위기 다운될까 봐 열심히 노력 중이었고 나는 가기 전 뭐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에 양말 벗고 없는 도구에 화장실 청소 급하게 하고 큰딸은 또 그걸 찍고(왜 찍는지는 모름) 기숙사 관리인이 계속 감시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 미안해서 저녁 차려주고 얼른 짐을 챙겨서 나왔다. 하필 우버도 어찌나 빨리 오던지... 기숙사 관리인을 안아주면서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고 그렇게 정신없이 코벤트리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코벤트리 버스터미널

버스 시간까지는 한 시간이 남았고 버스터미널 안은 이른 저녁시간인데도 다 문을 닫았다. 비가 와서 캐리어를 끌고 주변을 다닐 수도 없는 상황이라 맞은편 식당에라도 가자고 했더니 둘째가 배가 안고프다고 거부. 결국 가까운 마트 안에서 서성이기로 했는데 버스 안에서 먹을 초코바와 스무디 음료 두병을 사서 계산을 하고 나왔는데 화장실이 가고 싶단다. 다시 주변 햄버거집을 들어갔는데 화장실이 없고 마트에도 없고 결국 짐을 들고 다니기는 무리여서 나는 터미널에 앉아서 짐을 지키고 둘째가 혼자 도보 10분 거리의 맥도널드를 갔다. 밤에 혼자 보낸 게 걱정되는데 다행히 씩씩하게 돌아왔다. 맥도널드에서 주문 안 하고 화장실만 이용했다면서 나름 스스로가 대견하고 푸근한 표정이었다. 그렇게 다시 둘이 나란히 앉아서 버스 시간을 기다리는데 갑자기 터미널 안이 소란스럽다. 자전거를 훔치려는 도둑과 그걸 막으려는 보안요원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졌고 사람들이 둘러섰다. 속으로 혹시 저 도둑이 총기나 흉기라도 꺼내면 어떡하나, 일행은 없나, 도발해서 여기까지 오면 어디로 도망가야 하나 등 겉으로는 덤덤히 있었으나 머릿속에서 복잡한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있는데 다행히 싸움도 정리되는 듯 보였다.

인당 짐 1개인데 우리는 캐리어 2개에 이민지가방 2개와 아이스백이 들어간 이민자 가방 1개까지 총 3개다. 추가비용을 내라면 내야지 싶은 마음으로 버스를 타러 갔는데 다행히 친절하신 운전기사분이 "어? 너네 3개네? 오케이" 하고 짐을 실어주신다.


Hilton Garden Inn London heathrow Airport

2시간을 달려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다. 늦은 밤, 버스에서 내려서 다시 지하철을 타고 한정거장을 가서 역에서부터 걸어서 숙소에 도착을 했다. 구글맵 보면서 제일 무거운 캐리어 밀면서 앞서 걷는 둘째가 없었으면 얼마나 외로웠을까. 코벤트리에 큰딸을 두고 오는 버스 안에서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는데 둘째가 옆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내내 붙어있던, 셋이서 옹기종기 모여서 자던 공간에 첫째가 없는 밤이 무섭고 낮설고 허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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