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 원예사
세상에 많고 많은 직업 중 하필이면 대체 왜 마케터를 선택했니? 이따금씩 나는 과거의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하며 몰아세울 때가 있다. 물론 속 시원한 답변은 돌아오지 않는다. 질문의 요지는 ‘이렇게나 힘든데 왜 마케터가 되었냐’는 것이다. 모든 직장인들이 저마다의 사정으로 힘들겠지만, 마케팅 종사자는 유독 다양한 이유로 고통받는다. (내가 마케터라서 그런 것은 절대로 맞다.) 누군가 나에게 넉넉한 술과 긴 밤만 내어준다면 다음날 아침이 될 때까지 줄줄이 그 이유들을 나열할 수 있을 정도다.
대표적인 것 3가지만 간략히 이야기해 보자면, 첫 번째로 마케터는 유행에 뒤처지지 않고 발 빠르게 탑승해야 한다는 소위 트렌드 강박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 보니 어쩌다 유행을 놓쳤을 때 느끼는 자괴심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크고 쓰리다. 또한 빠르게 움직이는 유행을 무리해서 쫓아가다가 다리를 삐끗하기도 한다. 어설프게 이해한 밈을 부적절하게 사용해서 화를 부르는 경우도 종종 있고 말이다. 두 번째는 늘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에 머리가 쉴 틈이 없다. 두뇌 어딘가에 마르지 않는 아이디어 우물샘이 있어 필요할 때 두레박으로 퍼 올려서 사용하면 정말 좋겠건만… 삶은 판타지가 아닌 현실이기에 아이데이션은 항상 쉽지 않다. 아마도 내 뇌는 수년간 쉴 새 없는 고민으로 혹사 아닌 혹사를 당해서 쪼글쪼글한 건포도처럼 말라 있지 않을까 상상하곤 한다. 마지막으로 마케터 중에서도 AE라면 크게 공감할 텐데, 일을 할 때 습관처럼 눈치를 보게 된다. AE는 프로젝트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과 함께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완성하고, 그 과정에서 갈등을 최소화하는 게 중한 임무이다. 그렇다 보니 중간에서 눈치를 봐 가며 조율해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숙명이고, 이런 생활이 반복되다 보니 굳이 그렇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도 슬금슬금 사람들의 기분을 파악하고 신경 쓰게 될 때가 있다. 나 자신이 처량할 때도 있지만 이렇게 해야 마음이 편한 것을 어쩌겠나. 지금까지 내가 먹은 눈물 젖은 눈칫밥만 해도 수백 공기는 될 거라 감히 헤아려 본다.
이쯤 되면 이런 의문이 두둥실 피어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지금까지 마케팅에 몸을 담고 있을까? 약간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나의 답변은 꽤나 명쾌한 편이다. 나에게는 언제나 예고된 행복이 있으니까! 마케터의 머지않은 미래에는 팔 벌려 기다리고 있는 행복이 늘 존재하고 있다. 어떤 프로젝트를 끝마쳤을 때의 만족감과 성취감이 바로 그것이다. 마케팅은 기존에 없던 것을 0에서부터 기획하고 100이라는 결과물을 만들어 낸 뒤 세상에 내보내는 게 주요 업무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잘 여물은 열매와 다름없다. 얼마 전인 5월, 큰 규모의 프로젝트를 준비하느라 몸과 마음이 지쳐 있던 무렵에 개인 SNS에 이런 글을 업로드한 적이 있다. “7월 즈음이면 행복하겠지!” 7월은 그 프로젝트의 캠페인들이 하나 둘 세상에 빛을 보는 시점이었다. 별생각 없이 단순히 그날의 감상을 끄적거린 것뿐인데, 그 짧은 문구가 나의 마케터 인생을 관통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 나는 미래의 행복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이었지. 그러니 이 힘든 마케팅도 이토록 오래 할 수 있는 것이겠다. 지금 당장은 힘들어 때려치우고 싶네 어쩌네 해도 시간이 흐른 뒤 열심히 갈고닦아낸 나의 자식 같은 결과물을 꺼내어 보일 날이 오니까. 그리고 그것이 아직까지는 나에게 아주 중요하고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는 행복 중 하나이니까.
과거에 빗대어 보면, 평균적으로 하나의 프로젝트를 세팅하는 기간은 생각보다 훨씬 더 고단하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언젠가는 결과물이 완성되고 프로젝트도 끝이 난다. 그리고 흔히 KPI라고 이야기하는 정량적인 성과가 좋고 나쁘고는 관계없이, 잘 끝마쳤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얻을 수 있는 성취감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달콤하다. 준비 기간 동안 쏟아낸 땀과 노력이라는 원석이 어느새 연마의 과정을 지나 빛나는 보석이 되어 품에 안긴 것이니 얼마나 기특하겠는가. 겪어 보지 않은 사람들은 아마 모를 거다. 물론, 보석의 크기가 아주 작거나 빛의 강도가 미미할 수 있지만, 마음에 와닿는 크기와 깊이는 절대로 무시할 수 없다. 지금껏 나와 함께 한 수많은 캠페인과 콘텐츠들이 모두 그러했다. 그리고 대개는 프로젝트가 끝난 이후로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힘들었던 일련의 과정들도 미화되어 그저 행복했던 경험 중 하나로 기억 어딘가에 번듯하게 자리를 잡고 서 있기도 한다.
요즘도 가끔 떠올려 보는 때가 있다. 연차가 그리 높지 않던 시절이었는데, 나 스스로 파악한 나의 역량보다 높은 수준의 역량을 요하는 캠페인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닐뿐더러, 커뮤니케이션의 난이도도 높았기 때문에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스트레스를 받아서 진지하게 퇴사까지 고민하며 몰래 운 적도 있던 것 같다. (근데 이것도 앞서 말한 기억의 미화로 가물가물해졌다.) 이 어려운 상황이 끝나긴 할까? 생각할 즈음 캠페인이 성황리에 시작되었고 눈 깜짝할 사이에 끝이 났다. 날씨가 몹시 추웠던 연말에 야외에서 열린 행사였는데, 나중에는 추운 것도 까먹고 신이 나서 즐겼던 기억이 난다. 예상보다 빠르게 지나가 버려서 괜히 서운한 심정이 들긴 했지만, 준비 기간 내내 기다려 온 순간이었기에 너무나 후련하고 행복했다. 그때가 처음으로 ‘아무리 힘들어도 조금만 더 견디면 행복이 찾아온다!’라는 인생의 진리를 깨달은 순간이 아닐까 싶다. 그 이후로는 현재가 암울할수록 미래를 멀리 내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내가 아는 다른 마케터 중에서도 나와 비슷한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역시 마케터는 미래에 있을 행복 중 일부를 야금야금 미리 떼어먹으며 현재를 살아 가나 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시간이 약이다’ 힘든 시간을 견뎌내 보지 않은 시절에는 전혀 와닿지 않던 문구들인데 이제는 자주 되새겨 보며, 이 말들에 의지한 채 힘을 얻는다. 그리곤 먼발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행복을 미리 그려 본다.
아무것도 없는 맨땅에 아이디어라는 뼈대를 세우는 것. 그다음에는 공들여 목표한 결과물을 완성시키는 것. 그리고 이렇게 어렵사리 만든 것을 세상에 선보이는 것. 함께 준비한 사람들과 박수를 치며 서로를 토닥여 주는 것. 그동안 고생 많았다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며 술 한 잔을 기울이는 것. 구체적으로 상상할수록 하나의 티저 영상 혹은 예고편이 되어 뇌리에 박히는데, 그 뒤로는 예고된 나의 행복을 향해 나아가는 게 다음 단계다. 아마도 나는 미래에 있을 행복, 즉 성취감 때문에 마케터라는 직업을 평생 끊지 못할 것만 같다.
쉬이 찾아오지 않을 것만 같던 날도 시간의 섭리에 따라 당연스레 나를 찾아온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고 어두운 터널도 언젠가 끝나고, 그 끝은 대부분 밝고 찬란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현재의 내가 너무 힘들더라도 무너지지 말자. 그리고 그럴 땐 신이 인간에게 주신 특별한 능력인 상상력을 발휘해 행복할, 아니 행복한 미래를 그려 보자. 아마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글은 머릿속 원예사(=일명 대가리 꽃밭) 마케터에 의해 쓰여진 글입니다.
반박 시 머리에 꽃 심어드려요~
*커버 이미지 출처 - Unsplash (De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