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팅 바닥 생존기
마케터라는 직업은 홍보를 빼놓고서 설명하기 어렵다.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면 될 정도로 마케팅에서 홍보란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 그래서 디지털마케터 외길 인생을 걷다 보면 길목 길목에서 다양한 종류의 홍보를 마주하게 된다. 이를테면 바이럴마케팅 같은 것들이랄까?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요즘 *인플루언서 바이럴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인플루언서 바이럴? 파워블로거, 인스타그래머 등 영향력 있는 셀럽을 섭외하여 브랜드나 제품을 자연스럽게 홍보하는 방식) 나 역시 홍보 예산이 허락된다면 무조건 인플루언서 바이럴을 광고 전략에 끼워 파는 편이다.
불과 얼마 전에도 인플루언서 바이럴을 진행한 적이 있다. 뷰티 브랜드에서 개최한 팝업스토어 홍보 건이었는데, 그중 내가 맡은 것은 가오픈일에 방문한 인플루언서를 안내하는 단순 업무였다. 마치 큐레이터라도 된 양 공간 구석구석을 소개하고 마지막으로 ‘포스팅은 이렇게 해 주셔야 합니다’ 한 번 더 가이드를 주면 끝. 업무가 어렵지도 않을뿐더러, 평소에는 맨날 앉아서 머리만 쓰다가 바깥 공기도 마시고 사람도 만나니 기분이 무지하게 상쾌했다.
잠시 쉴 틈이 생겨서 흥얼거리며 팝업스토어를 한 바퀴 빙 훑어보는데, 행복한 표정으로 꺄르르 인증샷을 찍고 있는 인플루언서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때 문득 부럽다는 생각이 덮쳤다. 왜지? 왜 부러울까? 약 5초 간 골똘히 생각하다 보니 바로 답이 나왔다.
‘저 분은 오늘 저렇게 사진 찍고 가면 끝이네. 난 아닌데.’
팝업스토어에 방문한 인플루언서는 가이드에 맞추어 포스팅만 올리면 모든 게 끝이다. 이제 이곳과는 관련 없는 사람이 되는 거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럴 수 없다. 이 행사의 전반적인 홍보를 담당하고 있는 마케터는 팝업스토어를 벗어나도, 해가 지고 그 다음날이 되어도 끝이 아니다. 즉, 완벽히 분리될 수가 없다. 비단 이 행사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업무가 그러하다. 제안 시즌에는 잠들기 직전 제안서에 들어갈 카피를 떠올리기도 한다. (그러다 잠 못 들기 십상이다.) 주말에도 SNS를 하다가 웃긴 글을 보면 어떤 프로젝트에 적용하면 좋을지 상상한다. (그게 일요일이라면 출근 생각에 자칫 우울해지기 십상이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은 이 몹쓸 책임감 때문에 자꾸만 일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더 잘 하고 싶어서, 더 좋은 결과를 내고 싶어서. 특히 마케터라면 이런 습관은 정말이지 어쩔 수가 없다.
이처럼 일과 삶을 분리하는 것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추천해 주고 싶은 방법이 있다. 완벽한 분리가 어렵다면 적어도 일과 삶 사이에 거리두기 정도는 꾸준히 연습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일삶적 거리두기’라고 부른다. 물론 아직 나도 일삶적 거리두기가 익숙하진 않지만 이거라도 안 하면 언젠가 화르륵 한 줌의 재로 소진되어 버릴까 무서워 차차 노력하고 있다. 직장인을 위한 일삶적 거리두기의 핵심은 책임감 있게 업무에 임하되, 그보다 중요한 나 자신을 돌보는 것도 꽤나 큰 책임감이 필요한 영역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강아지들은 사람, 특히 주인을 향한 애착이 남다르다. 멀리서 발소리만 들려도 문 앞에 앉아 꼬리를 흔들며 주인을 기다리고 있을 정도로 말이다. 허나 주인과 분리되는 훈련을 제때 받지 못한 강아지는 사랑하는 주인과 잠시만 떨어져 있어도 낑낑거리며 안절부절못한다. 전문적인 단어로 분리불안이라고 하는데, 나는 이 현상을 직장인과 업무에 대입시켜도 크게 이질감이 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일에 대한 애착도 크면 클수록 삶과 분리시키는 게 불안하고 힘들다. 그래서 우리는 일과 삶 사이에 적정한 거리를 두는 훈련을 의도적으로라도 해야 한다. 훈련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그리 대단치 않으며 딱히 정해진 답 또한 없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적의 훈련법을 찾으면 그만이다. 레퍼런스가 궁금하실 분들을 위해 나의 훈련법 몇 가지를 적어 보겠다.
[일삶적 거리두기 훈련 – 여가시간 편]
24시간 중 수면 시간을 8시간이라고 치면 남는 시간은 16시간. 평일 기준으로 직장인은 깨어 있는 시간 중 절반인 8시간을 모니터 앞에서 보낸다. 그렇다면 남는 시간은 고작 8시간. 일하는 시간과 여가시간의 비율이 1 대 1 이라니 이건 뭐 한 입 소맥 비율도 아니고, 참으로 기이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얼마 안 되는 평일 여가시간이기에 더욱 악착같이 알차게 사용해야 한다. 깨어 있는 시간 내내 일만 하다가 잠드는 건 너무 슬프니까. 평일 저녁 퇴근하고 난 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방금 전까지도 일하던 그 상황에 뇌가 머물러 있는 기분이다. 그래서 나는 평일 여가시간에도 일 말고 다른 무언가를 꼭 하고 잠에 들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평일 저녁은 너무 힘들다, 하는 사람들도 걱정하지 마시라! 우리에게는 신이 주신 48시간의 꿀 같은 주말이 있으니 말이다.
일과 삶 사이의 거리를 두려면, 평일 저녁이건 주말이건 취미활동을 만드는 게 좋다. 특히, 일 생각을 떨쳐내고 나에게 집중하기에는 몸 쓰는 취미활동이 제격이다. 마음만은 10년 차 연습생인 나는 작년 여름부터 방송댄스와 걸스힙합을 배우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약 5개의 곡을 섭렵했다. 빰빰 터지는 스피커 앞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춤을 추는데 일 생각이 날 리가 만무하다. 뭐, 내가 댄스 전도사는 아니기에 꼭 춤을 추라는 뜻이 아니다. 밖에 나가서 30분 이상 걷기, 코인노래방 가서 악 지르기, 헬스장 가서 무게 치기, 홈트 영상 틀어놓고 따라하기 등 여가시간에 몸을 쓰며 할 수 있는 취미활동은 수만 가지다.
몸을 쓰다 보면 몸으로 열이 오르고 상대적으로 머리의 열은 식는다. 그리고 정신없이 움직이다 보면 일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렇게 일과 잠시나마 멀어질 수 있다. 또, 이런 날에는 잡생각 할 새 없이 바로 꿀잠에 들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일삶적 거리두기 훈련 – 휴가 편]
부끄러운 얘기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휴가에도 업무에 신경 쓰는 내 모습, 개멋져’ 하고 취해 있던 적이 있다. 왠지 모르게 프로페셔널한 직장인이 된 느낌이었달까? 하지만 지금은 짧든 길든 휴가 기간에는 최대한 일에 관심을 갖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꼼꼼한 사전 백업 요청이다. 입사 초기에는 백업 요청하는 게 죄송하고 번거로워서 ‘휴가 기간에 잠깐 챙기지 뭐.’ 안일하게 생각했던 적이 있으나 지금은 절대 그러지 않는다. 동료에게, 그리고 내 휴가에게 민폐가 되지 않도록 아주 꼼꼼히 업무 백업을 요청하고 휴가를 떠난다. 보통 부재 기간 동안 내가 맡은 프로젝트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시뮬레이션을 해 가며 인수인계를 작성하는 편인데, 이렇게 하면 3번 연락 올 것을 1번으로 줄일 수 있다. (연락이 한 통도 오지 않으면 베스트!)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프로젝트가 잘 돌아가고 있는지, 문제가 생긴 건 아닌지 걱정이 되어도 최대한 일과 거리를 두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나 하나 휴가 갔다고 회사가 돌아가지 않으면 둘 중 하나겠지. 회사의 시스템에 문제가 있거나, 알고 보니 내가 회사의 대표였거나(?)
오랜만의 휴가를 앞둔 지금, 편안하고 안전한 일삶적 거리두기를 위해 아이폰-설정에 들어간 뒤 아웃룩(메일)과 팀즈(메신저) 알림을 전체 off 하고 비행기에 오른다.
[일삶적 거리두기 훈련 – 술자리 편]
술 마시면서도 훈련을 한다고요? 생뚱맞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나에겐 술도 아주 중요한 일상이기 때문에 술자리에서도 일삶적 거리두기를 꾸준히 실천하려고 하는 편이다. 술과 사람을 좋아해서 술자리에 빠지는 것을 스스로 용납하지 못하는 성격 상 회사 사람들과의 술모임도 꽤 잦은데, 그렇다 보니 술자리에서 회사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뭐, 아예 안 하는 것도 이상하긴 하지. 하지만 술자리에서 일 얘기만 주구장창 하다 보면 머릿속에서 일 생각이 떠나질 않고 결정적으로 술맛이 썩 좋지가 않다. 그럴 때, 내가 외치는 마법의 주문이 하나 있다.
“지금부터 회사 얘기 꺼내는 사람이 한 잔 마시기!”
저게 마법의 주문이라고? 코웃음 치는 분들도 있겠지만 저 말을 외치는 순간, 정말 놀랍게도 술자리의 주제가 다른 것들로 바뀐다. 최근에 본 넷플릭스 시리즈, 주말에 가볼 만한 곳, 지하철에서 겪은 웃긴 일화 등… 술 한 잔과 함께 툭 털어 넘기고 일주일 내에 까맣게 잊을 가벼운 이야기들. 하지만 술자리에서는 오히려 좋다. 일더미에 둘러싸여 취하는 기분보다는 백 배 상쾌하기 때문이다. 여러분들도 언젠가 마법의 주문을 써먹어 보시길 바란다.
이렇게 열심히 일삶적 거리두기의 중요성을 설파했지만, 아마도 이미 업무와의 애착 형성이 끈끈한 직장인들은 분리를 어려워할 것이다. 이해한다. 그래도 일에 대한 애착을 오래, 그리고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의도적 거리두기가 꼭 필요하다.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한 길이다. 심리를 다루는 TV 프로그램만 봐도 얼추 알 수 있을 것이다. 과잉애착은 늘 독이 된다는 것을.
만약 이 글을 읽고 계신 지금 이 시점,
퇴근 이후거나/휴가이거나/주말이신 분들은 지금부터 회사 생각하실 때마다 한 잔씩 드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