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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탱님 Oct 05. 2019

Her, 1950

칠순 소녀 갬성 엄마의 러브 스토리

 * 표지 및 하단 사진 ;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엄마를 뵙기 위해 강원도 정선으로 향한 것은 2년만 이다. 먹고 사느라 바빴다는 이유가, 엄마가 아빠가 아닌 다른 분과 살고 계신다는 사실이 이토록 뜸했던 왕래의 핑계가 될까? 아니 애써 두둔해 보려 해도 나는 무정한 딸이다.

 

내가 중학교 2학년이 되던 해 아버지가 폐암으로 돌아가시고 십여 년을 홀로 사시던 엄마, 엄마는 7년 전 동네 아주머니의 소개로 지금의 아저씨를 만나 함께 살고 계신다. 엄마의 고된 인생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을 때 일곱이나 되는 자식들은 누구도 그녀를 비난하지 않았다. 궂은 농사일, 아버지의 병 수발과 더불어 그 많은 자식들을 멀쩡하게 길러낸 엄마의 공로 앞에 누가 감히 사족을 붙일까.

     

하늘은 엄마가 고달픈 인생을 버텨내 살아 갈 수 있도록 순수함을 주셨다. 올해로 칠순이 되는 그녀는 맑은 시냇물 같은 사람이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엄마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천성이 선한 사람은 누구나 알아보기 때문일까.  엄마는 하는 것 없이 동네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으신다. 아저씨 또한 평생 농사일만 하시다 사별하셨는데, 성정이 순하시고 양반 같은 분이다. 두 분은 함께 사신지 7년이 지났지만 단 한 번도 다툰 적이 없으시단다.


두 분을 보고 있자면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의 주인공이 떠오른다. 나는 엄마가 아저씨를 만나고서야 자신의 인생을 찾았다는 것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노년의 사랑이 젊은 시절의 그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엄마를 통해 직접 눈으로 보았다. 엄마는 칠순이라는 나이가 되어서야 인생의 황금기를 만나게 된 셈이다.

나이들어도 서로를 이토록 사랑할 수 있을까.

해가 질 무렵 도착했기에 두 분을 차로 모셔 임계의 작은식당으로 갔다. 만둣국과 칼국수를 한 그릇씩 먹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간식배는 따로라며 엄마는 오랜만에 온 딸을 위해 오늘 딴 옥수수를 삶아 내주신다. 세상에서 제일 맛난 엄마표 옥시시를 먹고 이웃이 선물해 준 산머루를 다듬으며 도란도란 사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제야 엄마의 낡은 집이 구석구석 눈에 들어온다.

     

엄마의 집은 성한 것이 없어 보였다. 장판은 닳고 닳아 종잇장처럼 얇아진 데다 이음새 부분은 사이가 벌어져 시멘트 바닥이 민망하게 드러나 있었다. 먼지가 수북이 쌓여 손대기조차 힘들어 보이는 장롱도, 허술하기 그지없는 싱크대도, 족히 내 나이는 되어 고물상조차 흥미 없어할 물건으로 보였다.

     

얼마 전 우리 가족이 입주한, 반듯한 새 아파트의 풍경이 겹친다. 최신 무선청소기와 건조기, 공기청정기 아이템까지 장착하고서도 모자라 인덕션, 음식물처리기, 로봇청소기, 다이슨 드라이기가 필요하다고 어제까지도 노래를 부르던 참이다.

     

‘그동안 나 혼자서만 잘 먹고 잘살았구나.’

     

그날 밤 세수를 하러 들어간 욕실은 또 얼마나 을씨년스럽던지, 어설프게 세수를 하고 바라본 거울 앞에는 끝까지 외면하고 싶었던 것이 머그컵 속에 들어 있었다. 그것은 엄마의 틀니였다. 그날 밤 나는 좀처럼 잠에 들 수 없었다.

엄마의 시골집은 꼭 저렇게 생겼다.

내 기준으로 엄마의 행복을 쉽게 재단할 순 없지만, 평생 고생만 한 엄마가 조금 더 좋은 환경에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 같아서는 서울의 새 아파트처럼 훤하고 번듯한 단독주택을 이곳에 지어드리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로 산뜻한 디자인의 장롱과 거실 장을 주문했다. 그리고 엄마 집 근처에 있는 지업사로 전화를 걸어 장판을 맞추고 시공 날짜를 잡았다. 며칠 후 장판을 시공하던 날, 진행 상황을 묻기 위해 엄마와 통화를 해야 했다.

     

“어, 딸~! 엄청 좋아. 엄청 깨끗해”

     

엄마의 음성은 어느 때 보다 밝았고, 들떠 있다. 새살림을 장만하는, 갓 결혼해 행복에 겨워하는 신부의 음성 같다고나 할까. 이번 시골집 방문 후 통장 잔고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지만 마음은 조금 두둑해졌다. 이제야 비로소 엄마의 새로운 시작을 축하하며 국수 한 그릇을 맛있게 나누어 먹은 기분이다.

     

세상의 엄마들은 딸들이 무얼 해준데도

“나이 들어 무슨 소용이냐”

괜찮다며 손사래를 친다. 하지만 깨끗하고 예쁜 것,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것은 누구나 매한가지다. 한데 우리는 그동안 여자로서 엄마의 인생이 헌 옷처럼 낡아가고 있는 것을 모른 척 덮어두고 살아온 것은 아닐까.

영화에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할머니는 혼자가 되신다.

부모님은 손에 좋은 것 열 가지를 쥐면, 그 모두를 아낌없이 우리에게 내어주신다. 하지만 나는 열 가지 중 한 두 가지도 망설인 끝에 내어주고, 내어 준 후에도 생색을 내며 불효녀 딱지를 떼고 싶어 안달하는 못난 자식이다.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받은 상이 아니듯이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 영화‘은교’에서 박해일의 대사

     

우리는 누구나 늙어 노인이 된다. 우리의 인생이 ‘후회’라는 이름으로  점철되기 전에,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 부모님을 인생의 중심부로 끌여당겨 가슴에 품고 살아가야하지 않겠는가. 우리를 위해 한평생 자신을 뒷전에 두고 살아온 그와 그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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