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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탱님 Nov 20. 2019

가면

고슴도치가 생존을 위해 뾰족한 털을 가졌고 카멜레온이 몸의 색깔을 바꾸는 것처럼, 저마다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살기를 하나쯤 가졌다. 그렇다면 나만의 필살기는 무엇일까? 오래 고민하지 않아도 결론이 내려졌다. 착한 사람처럼 보이는 가면을 쓰는 것이다. 1남 6녀 중 막내로 태어났지만 무작정 사랑받기보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환경에서 성장한 탓일까. 나는 손에 쥔 것을 웃으며 다른 사람에게 양보할 때 적어도 미움받는 아이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찍이 체득했다.


'착한 가면’이라는 필살기에 대해 내가 지금껏 해왔던 행동방식을 몇 가지 꼽아보면 이렇다.

남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는 내 이야기를 하기보다 들어주어야 한다. 이야기가 지루하더라도 강약이 조절된 리액션을 해 준다. 삼삼오오 밥을 먹으러 갈 때는 무조건 상대가 원하는 메뉴를 고른다. 식사 후 계산은 내가 해야 마음이 편하다. 무언가를 결정해야 할 때는 내 의사보다는 상대방의 결정과 기분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움직인다. 평상시 “미안해요, 죄송해요"라는 말을 습관처럼 사용한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최대한 상냥하게 보이려 노력한다. 물론 진심일 때도 있었지만, 24시간 세상 친절한 모드로 행동하는 거다.


이 착한 가면은 나를 사회에서 무난한 사람, 편안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부작용도 여럿 발생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눈치 보는 사람, 만만한 사람으로 이미지가 굳어 버리고 말았다.

가젤은 저 갸냘픈 다리로 최선을 다해 생을 살아갈테지.


배고픈 사자가 사막을 어슬렁거리다 가젤의 무리를 발견했다. 사자는 무리 중 가장 나약해 보이는 새끼를 표적으로 정하기 마련이다. 나는 어느 순간 새끼 가젤 되어 가느다란 다리로 생을 지탱하고 서 있다. 시키는 대로 움직여야 안전하다는 사실을 알기에 무리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린 시절부터 마음을 나누던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게 되었다.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영화를 봤다. 언제 만나도 어제 본 것처럼 편한 친구였다. 우리는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헤어질 무렵 친구는 나에게 뜻밖의 말을 건네 왔다.


“무명아. 너는 왜 주관이 없어? 네가 하고 싶은 건 뭐야? 진짜 원하는 게 없어?”


“음... 내가 원하는 거....?”


“그렇잖아. 오늘 하루를 돌이켜 생각해 봐. 네가 가고 싶은 곳, 먹고 싶은 음식, 보고 싶은 영화, 어느 것도 선택한 적이 없어. 예전에 내가 알던 너는 부끄러워하면서도 하고 싶은 말은 하는 사람이었는데... 뭐랄까. 지금은 네가 좀 다른 사람이 된 거 같아. 남에 대한 배려는 많이 하면서 정작 너 자신에 대한 배려는 하지 않는 것 같다고.”


하지만, 나는 여전히 세상 밖 맹수들이 무섭고 두렵다.


갑작스러운 친구의 말에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그저 누구에게나 하는 것처럼 친구를 대했을 뿐인데... 변했다는 친구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지금 나 자신이 어떤 모습일까 생각해 보았다. 저 멀리 먼지를 잔뜩 덮어쓴,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가젤의 모습이 보였다.


이 일을 계기로 스스로에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무리에 기대 목숨을 연명하며 살 것인가?,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누구를 위한 차케병이였나?’ 어쩌면 무리를 벗어나 더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착한 가면을 쓴 채 살아가는 일도 그만두고 싶었다. 친구의 말처럼 나 자신을 더 배려하며 살아가야겠다는 확신이 들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가젤의 머리에 조금씩 뿔이 돋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험난한 길이어도 괜찮아.


양보와 배려가 미덕이라는 말은 박물관이나 가라지. 어디에서나 사랑받고 싶었던 막내의 꿈을 저만치 떠나보낸다. 나는 이제‘무난하고 착한 사람’이기보다 어디서든‘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사람’으로 남은 생을 살아갈 것이다. 이기적인 사람, 까칠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더라도 말이다. 건강한 가젤은 맹수의 표적이 되어도 삶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고 도망쳐 살아남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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