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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탱님 Nov 11. 2019

판단의 늪

퇴사를 목전에 둔 시기에는 동료들 얼굴을 마주하는 일 자체가 스트레스였다. 사무실 분위기를 ‘주사 과장’과 ‘여시 대리’가 장악하고 있었던 때이기도 하다. 주사 과장은 남다른 술 주정 능력에 수년간 승진의 문 앞에서 고배를 마셔야 했던 인물이다. 그는 승진만 시켜준다면 윗사람 앞에서 죽는시늉이라도 할 것처럼 굴었다. ‘여시 대리’는 편한 회사생활을 지향했다. 그의 몸에는 365일 여우의 피가 빠르게 회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주사 과장이 팀 회의에서 돌발 행동을 한 것이 이슈가 되었다. 회의를 마치고 탕비실에서 몇몇 직원들이 모여 ‘주사 과장’에 대한 험담을 했다. ‘여시 대리’는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대화에 참여했다. 수다맨도 울고 갈 기세였다. 그리고 한두 시간쯤 지났을까. 사무실에서 우연히, 그가 ‘주사 과장’에게 하는 말을 듣게 되었다.


“박주사 과장니잉~!! 제가 과장님 좋아하는 거 아시잖아요~! 진심이예용~!”     


콧소리가 잔뜩 섞인 음성이었다. 나는 ‘여시 대리’를 이렇게 규정하기로 했다. ‘가식적인 년’.  

우리에게 누군가를 함부로 판단할 권리가 있을까? 영화에서 82년생 김지영도 말하지 않았나. "저를 아세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사건 이후 팀원들 행동을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보는 습관이 생겼다. 직원들은 내가 만들어 놓은 판단의 덫에 쉽게 걸려들었다. 기분에 따라 직원을 대하는 태도가 냉탕과 온탕을 넘나드는 A팀장은  야누스의 후예, 토씨 하나를 가지고 트집을 잡으며 몇 번씩 수정 요청을 하는 B차장은 강박증 환자, 은근슬쩍 다른 팀원에게 일을 미루는 C과장은 게으른 양아치, 뒷짐을 지고 서서 자상한 성인군자처럼 굴지만 누구보다 계산이 빠른 D대리는 비겁한 방관자.


팀원들에게 배역을 붙여놓고 마음속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재판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했다. 가벼운 죄는 엉덩이를 몇 대 때려주고, 큰 죄는 철퇴라도 내릴 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나 자신에게 문제가 생기고 있음을 감지했다. 직장에서 켜진 이 판단 스위치가 퇴근 후에도 꺼지지 않는 것이다. 누가 옳고 그른지, 정상이고 비정상인지, 책임감이 있고 없는지, 똑똑하고 무지한지를 끊임없이 따지는 일에 몰두하게 되었다. 내가 맡은 배역은 포청천 뺨치는, 일 중독 판사였던 거다.


그 결과, 가장 큰 피해자는 다름 아닌 나였다. 누군가를 멸시하고 혐오하는 마음은  암세포처럼 무럭무럭 자랐다. 이대로 나아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는 일에 비해 월급을 겁나 빵빵하게 주는 회사였다. 하지만 내려놓아야 할 때 였다. 추락하는 헬기에서 낙하산을 메고 뛰어 내리듯 퇴사를 했다.

안타깝게도... 사무실에 포청천의 자리는 없다. 올가미를 씌운 것은 나 자신이었다.


돌이켜보면 꽤 긴 시간 나만 상처 받았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퇴사 후 한걸음 떨어져 보니 이제야 내가 제대로 보인다. 왜 내가 좋아하지 않거나 이해할 수 없는 사람, 또는 내 가치관과 맞지 않는 사람들 행동을 보았을 때 그 사람들이 무엇인가 잘못됐다는 식으로 반응했을까? 왜 그들이 내 마음에 드는 행동만을 해주기를 바랐던 걸까?          


마셜 B. 로젠버그는 ‘비폭력 대화.’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거나 분석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가치관과 욕구의 비극적인 표현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것이 비극적인 이유는, 이런 식으로 자신의 가치관과 욕구를 표현하면, 우리가 걱정하는 행동을 하는 바로 그 사람들이 우리에게 거부감을 가져 방어와 저항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판단의 늪에 빠지면 자연스레 적이 많아진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 고립되어 홀로 싸워야 한다.

나는 작은 사무실을 나와 어디인지 모를 곳으로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나는 누군가를 판단할 만큼 완벽한 인간이었나. 결코 그렇지 않다. 이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 같다. 이제 다른 사람이 내 마음만큼 ‘좋은 사람’이 되길 바라는 대신 내가 ‘좋은 사람’이 되어 사람들 사이에 남고 싶다. 성숙한 인간관계가 무엇인지 고민하며, 좀 더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


글을 마치기 전, 지금 이 순간 지난 시절의 나처럼 누군가를 끊임없이 판단하고 규정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만 멈춰야 한다고 말해 주고 싶다. 그것이 바로 건강을 유지하고, 삶을 윤택하게 하는 비결이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잊지 말아야 한다.




※  ‘공대생의 심야 서재’에서 글벗들과 ‘비폭력 대화’를 함께 읽고 쓴 글입니다.

      다음 편에서는 '누구를 위한 차케병인가?'라는 제목으로, 까칠함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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