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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의 숲 Apr 25. 2020

망한 소개팅을 통해 배운 예의와 존중

아무리 나중에 볼일 없는 사람이라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킬 것




드라마나 소설에서는 주인공과 연결된 붉은 실을 맨 사람이 운명을 머금고 나타나는데, 나는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기까지 꽤 오랜 시간 방황했다. 어리고 이기적인 마음은 좋아하는 마음마저 문을 닫게 만들었나 보다.

그래도 이 지구 어디엔가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붉은 실을 맨 그 사람을 찾기 위해 소개팅을 열심히 하던 시절이 있었다. 세월이 흘러 돌아보니 소개팅으로 사귀게 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나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그러던 어느 날, 온통 친절한 가식으로 채워지는 소개팅이라는 자리에서 누군가의 '민낯'을 보게 된 사건이 있었다. 그 문제의 소개팅은 대학시절 대외활동을 통해 알게 된 친구가 만들어준 자리였다. 친분이 없는 친구가 주선하는 소개팅은 위험하다.

그 남자는 교사라는 직업에 굉장히 관심을 보였다. 방학 때도 월급이 나오는지, 출근하는 것에 비해 얼마를 받는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질문을 했다. 그리고 편하게 쉬면서 돈을 받으니 좋겠다는 자신의 감상도 덧붙였다. 물론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웃는 낯에는 침을 뱉지 못한다는 속담처럼 그게 정말 궁금했나 보다 하고 넘겼다.

하지만 노력을 해도 기분을 숨길 수 없는 법. 점점 그 남자에 대한 호감이 떨어졌다. 그 말은 상대방의 직업에 대해 존중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그런 내 표정을 읽었지는 그 남자도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멀리서 봐도 가까이서 봐도 망한 소개팅이었다.


카페에서 커피 두 잔을 바라보며 어색한 기운을 벗 삼아 꾸역꾸역 시간을 채우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친절했던 그 남자의 말투와 태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그 남자는 평소에 취미가 무엇이냐고 물었고, 나는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고 답했다. 그러자 "저는 책 잘 안 읽어요. 전공서는 도움이 되니까 보는데, 그냥 책 많이 읽는 사람들 좀 한심해 보이던데."

세상에. '한심'이라는 단어 자체도 사람에게 잘 쓰지 않는 단어지만 소개팅 자리에서 들어보긴 난생처음이었다. 무례한 발언은 한심이라는 단어를 기점으로 폭주하기 시작했다.


당시 내 휴대폰 케이스에는 라이언 캐릭터가 그려져 있었다. 그 남자는 라이언 캐릭터를 좋아하냐고 물었고, 파우치도 라이언일 정도로 귀엽다고 답했다. 그는 "라이언 표정이 멍청하고 둔해서 저는 별로던데."라는 말로 응수했다. 그 이후 말들은 애써 기억에서 지워버렸지만 이 두 가지는 정말 잊히지 않았다. 타인의 뇌리에 강한 인상을 주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소개팅을 여러 번 하면서 항상 나와는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했지, 사람 자체가 부족하다고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그 남자는 서울에 있는 명문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원 진학했다고 했다. 이과 계열에 있는 그 사람은 무언가를 연구 중이었고 자신이 개발한 프로그램으로 사람들의 삶은 윤택하게 만드는 것이 자신의 꿈이라고 했다. 자신은 충분히 백억 이상 벌 수 있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모든 것이 사실이거나 사실이 될 수 있더라도 타인을 위한다는 연구의 동기는 믿기 어려웠다.

벼락같은 시간을 견디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처음으로 주선자에게 따지고 싶었지만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아 관두었다. 그 만남은 당연히 마지막이 되었고 그 이후 서로 잘 들어갔냐는 인사조차 나누지 않았다. 망한 소개팅의 정석이었다. 그리고 이 시간을 통해 상대방을 대하는 태도와 말의 중요성을 배웠다.

아무리 궁금한 것이라도 상대방과 친해진 후에 조심스럽게 물어볼 것. 아무리 내 성향과 달라도 그 취향을 비난하지 않을 것. 아무리 나중에 볼일 없는 사람이라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킬 것.

이제 이름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 그 남자와의 에피소드는 분노가 아니라 웃음으로 남았다. 시간의 힘에 다시 한번 감탄하며 그 날 배운 깨달음을 다시 한번 떠올려본다. 부디 타인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고 싶다던 그 마음도 사실이 되길 살며시 바라본다.

p.s. 라이언은 귀여운 아이라는 것도 꼭 깨닫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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