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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Feb 06. 2024

비가 내리는 날이 싫다.

내리는 비보다 내가 '맞는' 비가 싫다.

요즘 들어 비가 자주 온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비가 정말 싫었다.

이유가 단순하지 않은가. 일단 나의 옷이 젖을뿐더러 나가서 하는 활동이 모두 제약된다.

특히 학창 시절 점심시간이든 쉬는시간이든 체육시간이든 반 아이들과 축구대항전을 하려고 준비를 다 하고 있으면 척척해진 운동장이 너희들에게 놀아줄 공간은 없다고 시위하는 듯한 저 몰골을 도무지 보기가 싫었다.


그래서 나는 항상 일기장에 비가 오는 날인데도 날씨란에 화창한 해를 그리곤 했다. 마음만이라도 어둑어둑한 비 내리는 날씨보단 화창한 날씨를 갈망했으니까. 이런 마음은 내가 사는 동안만큼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줄만 알았다.


그러다 2018년 학창 시절을 제외하고 제주도로 처음으로 대학친구들과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하필 날짜도 잘못 정해서 태풍이 제주도를 스쳐 지나가는 날을 골라버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비행기표는 다 예약되어 있고 렌터카도 비용을 다 지출한 상태인데... 그냥 우린 막무가내로 결항만은 되지 말아라는 바람으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다행히 도착한 당일 날은 폭풍전야라고 해야 할까. 하늘은 청명하게 맑기 그지없었고 저녁 비행기로 도착한 우리는 렌터카에 탑승 후 제주도 이리저리 맛집이란 맛집은 다 돌아다녔었다.


다음날부터 비가 슬슬 오기 시작하더니 억수 같은 장대비로 변모하고 말았다. 불행중 다행으로 태풍은 한국보다 일본에 가깝게 지나가며 위험한 정도는 아니었으나 우리는 비싼 비행기를 타고 온 제주도에서 장대 같은 비만 하루종일 맞았다. 사실 비가 오니 어디 가기도 싫고 일단 몸이 젖을 거라는 짜증이 그냥 온몸에 가득했다.

2018년 태풍 짜미 / 출처 위키백과

친구 한 명이 비도 오는데 제주도에 비자림이라는 곳을 가보는 것은 어떠냐고 제안했다. 나는 비 오는데 굳이 어딜 가느냐라고 반문하다가 제주도까지 와서 그렇게 의견표력을 하는 것은 사회부적응자로 보일 것 같아 한숨을 쉬며 그래 가보자며 렌터카 키를 집어 들었다.


얼마나 갔을까. 와이퍼 움직이는 소리와 강렬한 비트가 흘러나오는 자동차를 이끌고 우린 비자림에 도착했다. 뿌연 안개가 만연한 주차장에 도착하고 나서도 나는 불만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아니, 도대체 이런 곳에서 뭘 할 수 있겠냐며. 그때 친구가 날 아이 달래듯 밀어붙이더니 우비를 4장 사 왔다. 우비는 어차피 비 맞으라고 입는 옷이라며 걱정 말고 가자는 친구의 성화에 못 이겨 비자림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세상에, 이런 느낌도 있구나. 입장하자마자 하늘 높이 솟구쳐있는 나무가 마치 인왕제색도에 나오는 수묵화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정말 글로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기묘함이 나를 덮쳤다. 태풍이 거의 제주도를 빠져나가고 있었기에 바람도 별로 불지 않았지만 적적히 내리는 비와 뿌연 안개로 뒤덮인 나무 숲은 내 앞에서 웅장함을 뽐내고 있었고 그 거대함에 나는 그만 말을 잃고 말았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비자림을 다녀오고 나서 평상시 생각하던 '비'의 인식이 달라졌음을. 이렇게 무드 있고 적막하지만 세상을 고요히 적시던 비가 이런 느낌도 있구나라고 마음속에 절절히 다가왔던 것이다.

 


그 이후에는 비가 오는 날이면 일부러 카페도 가보고, 드라이브도 가며 내리는 비를 적적히 느껴보기로 했다. 특히 심신이 지쳐 우울한 날이면 내리는 비가 차창에 토독 소리를 내는 것을 보며 마음의 명상도 하고 안정감을 얻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에겐 비에 걸맞은 음악도 많지 않은가.


비스트의 '비가 오는 날엔', 에픽하이의 '비가 오고', 윤하의 '비가 내리는 날에는', 럼블피쉬의 '비와 당신' 등등 정말 비가 내리면 듣기 딱 좋은 음악들이 나의 귓가를 타고 마음속에 전해져 오면 느껴지는 그 말할 수 없는 감정은 어른이 된 지금도 좋기 그지없다.


여러분들은 어떠신가. 아직도 비가 오면 꿉꿉해지는 날씨만을 탓하며 한없이 처져있진 않은가? 그러다 가끔은 비 오는 날의 무드를 떠올려보는 건 어떨까 싶다. 어차피 이 비도 그친다. 그러나 비가 그치기 전까지의 그 무드는 마음속의 커다란 안정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댓글로 작가님들이 비와 관련된 음악을 추천해 주신다면야 나는 또다시 플레이리스트를 업데이트하여 또다시 혼자만의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이나 예전이나 내가 맞는 비는 여전히 감흥 없기는 매한가지다. 머리가 망가지기 때문에!

그래도 오는 비를 탓하진 말자. 그들도 슬픈 감정을 쏟아버리기 위해 하는 마지막 발악일 수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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