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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Jan 07. 2024

대격변의 시작

구르지 않는 돌에는 이끼가 끼기 마련이다.

위의 말처럼 구르지 않는 돌에는 이끼가 끼기 마련이다. 즉 인터넷에서 흔히 쓰는 '고인 물'이라고도 하는데, 어느 곳이든, 특히 직장에서는, 특히 공무원 사회에서는 이 고인 물들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명확하다. 한 자리에 한 업무만 몇 년 동안 하다 보면 그만큼 전문성도 높아지고, 업무의 이해도도 높아질뿐더러 자신감이 붙어 웬만한 변수가 발생해도 눈 깜짝하지 않고 쉽사리 일을 처리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논제의 모순은 결국 이끼가 낀다는 것이다. 즉 그만큼 요령이 발생하고 이는 부정부패, 소극행정 등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런데 나는 내가 쓴 글에서도 표현했지만 자존감도 높지 않을뿐더러, 주어진 일만 묵묵하게 하는 스타일이라 남들에게 피해 안 끼치고 열심히 하려는 것에 최대한의 목적을 두고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몇 년 동안 그 업무를 하면서 '이제 좀 알겠다! 이제 좀 업무에 대해서 변주도 줄 수 있고, 업무 진행에 대한 판단력이 확실히 늘었다'는 말을 하자마자 인사이동이 나서 다른 곳으로 팔려(?) 가는 장면을 볼 때마다 안타깝다고 생각이 들곤 했었다.


내가 지금 업무를 맡고 있는 지도 어연 2년 차, 처음 이 업무를 맡았을 때만 하더라도 밤 11시, 12시까지 불 꺼진 사무실에 혼자 남아 업무 매뉴얼을 달달 외우고 혹시 발생할 변수가 무엇이 있는지 수첩에 빼곡히 적고 아침 일찍 출근해서 오늘 하루는 어떤 업무를 먼저 쳐내야 할지, 이건 나중에 해야 할지 체크리스트를 만드는 데 몰두했었다. 정말 그때 당시만 하더라도 관련 지식이 전무했으므로 내가 혹여나 부서 직원들에게 피해는 주지 않을까 하루하루가 노심초사했었다.(전임자가 워낙 일을 잘했다는 직원들의 평이 날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처음엔 다른 부서에서 '이거 해주세요, 저거 해주세요, 이거는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저건 저렇게 하면 안 됩니다, 기한이 오늘까지인데 최대한 빨리 주세요'라는 빨간 제목의 메일이 도착했다는 알림을 볼 때마다 얼마나 가슴이 답답해지고 숨이 막히던지 공황장애가 올 것만도 같았다. 실제로 그 사이동안 몇 번의 자연재해 때문에 비상근무 한답시고 새벽부터 그날 오후까지 머리도 감지 않은 채로 폐인처럼 일 해보기도 했고, 어떤 날은 중요회의 자료를 다른 곳에 멀쩡히 저장해 놓고 수정 안된 자료를 제출했다가 부서장님에게 깨지기도 많이 깨졌었다. 특히 더군다나 내 업무가 서무, 즉 부서의 윤활유 역할을 하는 존재라 업무의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세심하게 그리고 전반적인 시야가 필요했던 것인데 이제 입사한 지 1년, 2년밖에 안된 신입이 그걸 어떻게 착착할 수 있었을까.(물론 전임자께서 일을 너무 잘하셔서 부담이 더 컸다.)


매일매일이 고역 같았고 지옥 같았으며 주말에 휴식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내가 느끼는 부담감이 날 옥죄어 오고 있었으니까, 그 때문에 밤잠을 설치면서도 머릿속엔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가 날 잡아먹고 있었으니까. 그때의 나는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발버둥 쳐봐도 이 일은 끝끝내 적응하지 못할 것만 같은 불안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 업무를 맡은 지 2년이 지났다. 결국 시간은 흘러갔고, 난 이 일에 대해선 어느 누가 물어도 관련된 답을 흔쾌히 줄 뿐더러, 관련 담당자들의 성함과 전화번호까지 달달 외울 정도로 통달하게 되었다. 나는 이제 어느 정도의 여유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내가 이 업무를 하는 동안에는 연애는 절대 못하겠거니 생각했지만 결국 연애도 해보고 큰 사랑도 겪어봤다.


그. 런. 데, 인사이동이 뜨는 날짜가 되고, 인사이동 명단에 내 이름이 버젓이 올라가 있는 것을 보았다. 기대도 하지 않았고 난 이 업무에 적응했기에 즐기면서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상승하고 있는 이 지금.


는 다른 곳으로 가게 됐다.


이 얼마나 청천벽력과 같은 일인가...! 대격변이다. 처음에 명단에 내 이름 세 글자가 있는 것을 보고도 믿지 못해서 거짓말인 줄 알았다.

그러나 잠시 후 미친듯한 진동을 동반한 내 폰에는 "주사님!!! 더 힘든 곳으로 가시네요.. 아이고 어떡해요.."라는 안타까움과 위로가 가득한 연락들이 즐비 차기 시작했다.


순간의 정이 지나고, 마음속에 이제 좀 진정된 듯했던 잔잔한 호수가 다시금 일렁이기 시작하고 일렁거림은 곧 커다란 파도가 되어 온 마음을 헤집기 시작했다. 아, 도대체 왜! 난 일을 잘하지도 않고 그냥 남들 하는 것처럼만, 이름이 밝혀지지 않는 숨겨진 존재로 살아가고 싶었는데 왜! 그것도 지금 한창 바빠서 모두가 죽어나간다는 부서로 간다니. 이게 도대체 가당키나 한 말인가? 당최 이해가 되지가 않았다.


지금 있는 부서에서 직원들과의 케미가 너무 잘 맞았기에 다들 형님, 누님으로 통성명하며 좋은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결국 이게 인생인 것이다. 아,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구나. 혹시나가 역시나라고 내가 꿈꿔왔던 여유 있는 주말은 이제 안녕이구나..


대격변이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인 것이다. 어지러운 마음을 이리저리 내던지고 침잠하며 안정을 시키려고 해도 처음인 것은 되돌릴 수 없다. 이때껏 체득해 온 업무를 내려놓고 나는 다시 새하얀 백지장이 된 것만 같았다. 아, 또다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려면 얼마나 많은 고뇌를 하고, 야근을 하고 할 텐가.(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서 두통약도 먹었다.)


그렇지만 나도 이제 어리광만 부리던 20대가 아니란 것을 스스로 상기시키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부서지면서 시간만 지나면 적응할 것이라는 막연한 모르핀 진통제를 머릿속에 쑤셔박으며 자기 위로를 할 수밖에 없는 노릇인 거다.

잘해봐야지. 내가 누누이 기조로 삼았던 남들에게 피해 주지 않는 삶을 살려면. 더더욱이 노력해야지.

그래, 나는 어쩌면 '이끼'가 끼어서 구르지 않는 돌이 되었던 거야. 구르지 않는 돌이 될지언정 굽이쳐 흐르는 강물의 미친듯한 흐름에 빠져서 쉴 새 없이 굴러가는 돌이 되어봐야지. 한번 더 가슴에 주문을 외우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는다.


공무원들은 지금이 제일 어수선하다. 일도 안 잡히고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인사시즌이 되면 마음부터가 이미 붕 떠있으니까. 어수선한 분위기는 마치 사람들도 빼곡히 가득 찬 놀이공원과 같다. 어디 갈지도 모르는 어린아이 마냥 눈에는 그렁그렁 닭똥 같은 눈물을 지닌 채 틈새를 비집고 움직이는 그 모습처럼..


굽이쳐 흐르는 강물에 빠져버린 흐르는 돌처럼 모두가 같은 마음,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그 돌이 끝까지 완주하여 고운 모양새를 가진 보석(원석)이 될는지 혹은 심신이 망가져 깨지고 부서져버린 돌이 될는지는 아무도, 그 아무도 모른다.


나의 자존감으로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브런치에 글을 남기며 이때를 회상하고 싶다.

심란한 나의 마음. 부디 잘 이겨내고 보석 같은 완주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외롭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그리고 무섭기도 하다.
이런 것이 대격변이라면 난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뭐든 나에겐 스트레스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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