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뇨환자의 장래희망

넌 무엇이 되고 싶다가 아니라 되어야만 한다.

by 윤슬

어린아이들이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서 자주 듣는 질문 중 하나는 바로 장래희망이 무엇이냐일 것이다. 그래서 옛날 반아이들의 장래희망을 가볍게 훑어보면 대통령은 기본이거니와 우주인, 조종사, 예술가 등등 온갖 희한한 장래희망들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서 화가라고 자신만만하게 적었던 것 같다.


시간이 흐르면서 화가로 배부르게 사는 사람들보다 배고픈 화가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여러 매체들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고 막연한 화가보단 미술 선생님이나 일러스트레이터라는 직업으로 눈을 돌려보기 시작했다. 실제로 초등학교에서 개최하는 미술대회에서 입상도 하고 관련 학원도 다녔으며 방과 후 수업도 무조건 그림 그리는 활동을 선택했었기에 화가라는 직업은 나에게 최적인 줄 알았더랬다.




그러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나는 우연히 방송댄스를 접하게 되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나에게는 소질이 있었다! 언젠간 화가나 미술 선생님이 되어 성공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라던 터무니없는 희망은, 나보다 날고 기는 실력자들이 주위에 훨씬 많다는 것을 깨닫고는 흥미를 급격하게 잃어가고 있었기에 방송댄스라는 색다른 취미는 놀라운 경험이기도 했다.


생각보다 방송댄스는 훨씬 재밌었고, 무엇보다 몸을 움직이며 운동을 할 수 있어 건강관리에도 좋은 영향을 미쳤다. 한창 질풍노도의 시기인 중학생이 방송댄스를 통해 사람들이 환호해 주고 좋아해 준다면 그 얼마나 자존감이 하늘 높이 솟구치겠는가. 실제로 나는 방송댄스를 통해 그 당시 싸이월드에 일촌신청이 우르르 몰려오곤 했었다.(지금은 물론 흑역사다.)


자연스레 나의 장래희망은 또 바뀌어서 방송 댄스트레이너 혹은 전문적인 댄서가 되고 싶었다. 댄서는 왠지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면서 건강도 챙길 수 있고 동시에 돈도 버는 일석이조 혹은 일석삼조의 직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난 그때부터 항상 댄스음악을 끊임없이 듣고, 집에 돌아와서도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연습실로 향했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극구 반대하셨다. 당시 댄서의 이미지란 지금처럼 스우파나 굵직한 이름 있는 댄서들의 이미지로 생각하면 안 됐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님, 즉 기성세대들의 시선으로 바라봤을 땐 댄서들이란 그저 춤추는 각설이 정도로만 생각하셨을 것이다. 한 번은 정말 진지하게 진로상담을 부모님과 한 적이 있었는데 마지막엔 등 돌리고 말도 섞기 싫었을 정도로 극심한 갈등에 다다르기도 했다.


그렇다면 부모님이 나에게 가장 원했던 직업, 즉 장래희망은 무엇이었을까. 그렇다, 지금 내가 일하고 있는 공무원이었다. 철밥통이라고 불리던 공무원말이다. 그래서 정부 24를 통해 초등학교에서부터 고등학교까지의 생활기록부를 열람해 보면 부모님은 한결같이 공무원 혹은 사무원, 회사원을 나의 장래희망 칸에 적어두셨다.


무엇보다 본인이 낳으신 아들이 활동량이 많은 직업이나 변변치 않은 직업이라도 갖게 된다면 나의 건강에 지대한 악영향을 미친다고 판단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아들이 어떠한 질풍노도의 시기라도, 자신들을 보기 싫다며 소리 지르고 일탈을 일삼더라도 본인들은 그 장래희망을 갖게 해 주기 위해 끊임없이 세뇌(가스라이팅) 하셨다.


자아정체성이 가장 중요한 중학생을 지나 고등학교로 입학했을 때였다. 본격적인 대입준비를 위해 나의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현실적인 최적경로는 무엇인지 고민해야 할 때가 다가오자, 무심코 나는 부모님이 원하시던 장래희망의 늪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래, 내 장래희망은 공무원인 것 같아. 그렇다면 어떻게 공무원을 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이 드디어 나의 머릿속에 스스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대학교도 행정학과로 합격하여 본격적인 공무원을 위한 삶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물론 대학교에서 배웠던 전공지식은 휘발성으로 인해 거의 다 날아갔다고 해도 무방하지만, 일단 행정학과라는 사실만큼은 공무원 선배들을 매년 배출해 온 성과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뭔지 모를 경외심과 존경심이 들었고 대학동기들 간에 우리도 언젠간 공무원이란 조직에서 만나자고 다짐해 왔다.




지금은 공무원에 입사한 지 약 5년이 다되어간다. 처음 입사할 때만 하더라도 공익실현에 대한 자부심이 넘쳐서 시민들을 위한 희생은 당연하다고, 이 한 목숨 다 바쳐 조직에 이바지해야겠다는 맹목적인 열정만 가득했었다.


이제는 많이 바뀌었다. 물론 공익실현이란 목적은 공무원들의 존재의미이기도 하며 영원한 과업이기도 하지만 5년이란 세월 동안 내가 겪었던 수많은 사건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수많은 민원인들의 불만과 욕설, 조직 내 사람들 간의 관계에 이리저리 치여 혼자 자취방에서 눈물을 참아가며 마시던 맥주, 몸이 아파도 산처럼 쌓인 업무로 인해 진통제로 버티며 야근하던 그 날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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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가만히 앉아있다가 무심코 내가 왜 공무원이 되겠다고 했는지 그 기원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조용히 마시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고 잠잠히 고민하기 시작했는데, 돌고 돌아 마지막은 "부모님이 하라고 했으니까"로 귀결되고 만다. 내가 원하던 장래희망이 맞았나? 아니라면 내가 하고 싶은 장래희망은 뭐였을까? 만일 내가 원하던 장래희망을 그대로 밀고 나갔더라면 지금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을까?


물음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를 빙빙 휘감기 시작했다.

"무엇이 되고 싶다"가 아니라 "되어야만 한다"라던 어린 날의 강박이, 아니 그들이 나에게 심어둔 강박이 이제는 내가 진정으로 무엇이 되고 싶어 하는지를 잊게 만들었다. 물론 실제로 활동이 제한적인 사무직원이라 건강관리하기엔 적절하다고는 하지만, 항상 스트레스 및 야근에 시달리는 것을 보아하니 이런 활동도 그다지 내 건강에는 선한 영향력을 주고 있다고는 말을 못 하겠다.




부모님은 이제 한 마디씩 하신다.

"공무원이면 무조건 6시 땡 하면 퇴근하는 줄 알았다. 그리고 그만큼 스트레스도 안 받을 줄 알았다. 무엇보다 돈을 그렇게 밖에 못 받으면서 야근을 밥 먹듯이 하는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만둬뿌라! 딴 일 찾아보거라!"


네, 알죠. 공무원이 이렇게나 자질구레하고 지지리도 재미없는 삶이란 건 아주 잘 알죠.

그런데요, 제가 이제 뭘 원하는지, 무엇이 하고픈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공무원에서 일한 능력을 어디 가서 써먹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요. 다른 데서 절 받아줄 바엔 다른 유능한 젊은 직원을 받는 게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게요, 저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거 같아요. 공무원 말고는 더더욱이요.

당뇨환자라서 이런 것일까요, 혹은 당뇨환자들 중에서도 저만 이런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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