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슬 Jan 13. 2024

가면은 벗어지지 않는다

  무인도에 사는 것마냥 모든 속세와 대인관계를 끊어놓고 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면 모든 사람들은 사회적 동물로서 항상 연결(Connection)되어 있다. 그러므로 항상 혼자서 생각하고 독단적인 행동을 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도 남들과의 관계와 이후 발생할 결과를 예상하며 그에 걸맞은 행동을 조절하고 억제하게 된다.


그 결과, 사람들은 '가면'을 쓰고 살아가게 되는데, 그 가면이란 남들에게 보이는 '자아'와 내가 진정으로 살아가게 되는 '자아'가 별도로 구분되어 필요시 가면을 바꾸어가며 사회관계를 유지해 가는 방법을 말한다.


예를 들어, 사회에선 한없이 친절하고 상냥하고 무조건적인 배려를 하는 '착한' 사람이 집에 돌아와 '가면'을 벗게 되면 골목길에서 담배를 한대 피우며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는 그런 거라던가. 혹은 사회에선 까칠해 보이고 차가워보이며 항상 날이 서있어 보이던 '예민한' 사람이 집에 돌아와 자신의 반려동물에겐 알아들을 수 없는 애교를 부리면서 바닥에 뒹굴거리고 있는 그런 거라던가.


  하지만 진정한, 진정한 의미로서의 '가면'은 벗어지지 않는다. 정말로 자신의 자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 것인가.


나로 말하자면 위에서 말한 사례처럼 사회생활을 하며 상대방의 기분을 먼저 파악하고 그에 따라 최대한 남을 배려해 주는 방식을 택하는 타입인데, 그래서 이런 말하기는 부끄럽지만 대인관계면에서는 항상 좋은 평을 듣고는 한다. 잇프제(ISFJ)의 F가 공감을 많이 하는 타입이라 그런지 뭔가 남의 상황에 쉽게 동화되고 감정적인 공감을 많이 하는 편이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는, 퇴근을 하는 순간 나는 무표정의 가면을 다시 쓰고 만다. 사무실에서는 원래 갖고 있던 목소리의 음정을 높여 싹싹한 직원이었지만 퇴근하는 길의 자동차 속의 나는 저음의 목소리를 다시 꺼내며 나의 자아와 만나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집에 돌아와서는 편안함과 안락함을 느껴야 하는 순간에도 이 놈의 가면은 벗어지지 않는다. 무표정의 가면은 내 피부와 접합되어 입꼬리를 올릴 새도 없이 잠을 자는 그 순간까지도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가만히 침잠하게 된다.

  즉, 삶이 재미가 없다. 공무원에 합격하기 전만 하더라도 내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삶이라면 일은 열심히 하고 쉴 땐 확 쉬어주면서 힐링도 하고 기분전환도 하겠다는 원대한 다짐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업무는 더 많아지고 의전업무도 병행하는 일이 많아지기 시작하면서 내 원대한 다짐에는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그 때문인 걸까. 점점 삶에 재미가 없어지면서 그저 그런 무던한 사람으로 바뀌기 시작하는 동시에 나를 덮고 있던 가면의 접착성도 더욱 끈적해졌다.


벗어지지 않는 나의 '재미없는' 삶. 도대체 언제쯤 무표정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내 진정한 자아를 만날 수 있을까. 자아를 만난다는 것은 생각보다 상당히 어려운 일이며 가면을 벗어던지지 않는 이상 절대 만날 수 없는 꿈속의 허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웃긴 건 가면을 벗어내려는 노력을 하고 있느냐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한다면, 나는 "아니요"라고 답할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평상시에는 남들과의 관계 속에서 활발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가끔은 아니 자주, 추운 겨울 따뜻한 이불속에 몸을 숨기는 것처럼 고독감과 외로움을 찾아 스스로 품어드는 행동을 하게 되는 이중적인 모습을 바라보자면 가면은 내 얼굴에 고정되어 있다는 방증을 나타내는 것이다.


요즘은 책을 읽으면서 자아와 관련된 글을 자주 접하는데, 브런치에도 많은 작가분들의 글을 보면서 '인생관, 자아성찰, 우울감, 고독감, 홀로 등'이라는 주제에 숨겨져 있는 '가면'의 종류를 상상할 때가 있다.

내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은 어떤 가면을 쓰고 있을지도 상당히 궁금한데, 그 가면은 가벼운 소재로 이루어졌을 수도 있고, 나보다 더 접착성이 강한 딱딱한 소재일 수도 있다. 그만큼 본인이 겪고 있는 상황이 크나큰 변수로 다가오는 것이며 주위의 삶과 본인이 혼자서 경험하는 삶의 괴리가 크면 클수록 그 가면의 두께감은 천차만별로 다를 것이다.

아아 나는 몰랐었네 내가 받은 사랑을
아아 나는 몰랐었네 웃어 보일 방법을
아아 나는 몰랐었네 내가 받은 사랑을
아아 나는 몰랐었네 사랑하는 방법을
다시 오는 봄 피우지 못할 꽃
불안한 마음으로 또 휩쓸리는 밤
보이지 않는 삶 내 작은 마음밭
애처롭게 얼룩진 나의 자화상
- 「자화상」 정우

요즘 인디가수 정우님의 자화상이라는 음악을 자주 듣곤 한다. 이 음악을 들을 때마다 나의 가면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다시금 상기하는데, 나는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를 둘러싼 '자아'를 사랑하는 방법을.


불안한 마음으로 또 휩쓸리는 밤에 이 가면은 단단히 고정되어 오늘도 무표정으로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언젠가 이 가면이 벗어지기를 기도하면서 나는 나이가 들어가며 또 평범한 무던한 삶을 지낼 것이다.


방의 캔들워머가 은은하게 조명을 빛내며 나를 비춘다. 마치 내 가면에 대해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듯이.

작가의 이전글 당신이기에, 당신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