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여자의 용기와 선견과 지혜를 인정한 첫 사례
이 세상의 각 절반은 남자와 여자다. 인류가 가족과 집단을 이루며 공동체로 살아간 이후 남과 여는 조물주가 지어준 각자의 역할로 지금까지 성장 발전해 왔다. 남자는 여자보다 육체적으로 힘이 더 세고 용맹한 관계로 주로 사냥 등 외부와 부딪히는 외향적인 역할을 하며 살아왔다. 반면에 여자는 남자보다 더 감성적이고 섬세해서 육체적으로 힘든 일보다는 아이를 기르고 집안을 보살피는 등 내부의 일에 치중하며 더 내향적인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5G세대니 4차 산업사회니 하며 최첨단 과학세계를 살아가는 요즘 세상은 어떤가? 남녀를 명확히 구분하여 남자만 할 수 있는 일, 여자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명쾌히 이등분할 수 있는 일이 지금 세상에 과연 얼마나 될까.
엣 직장 친구들과 남한산성을 오르다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어느 여직원 참 일 잘 했는데 그 친구가 지금이라면 부장도 했을거란 얘기를 했다. 그래서 나는 그 친구들에게 성경에서도 최초로 이 세상을 바꾼 사람은 여자라고 얘기를 해 주었다. 역사적으로 한 여자의 현명한 지혜와 결단력이 결국에는 그리스도 예수님이 있게 된 동기가 됐다고 했다. 물론 나는 이를 설명하는데 있어 목사님이나 전도사님의 그 그림자 곁에 서 있기도 부족한 사람이다. 그런데도 친구들은 내 이야기를 호기심 있게 들어주었다.
구약 창세기에 의하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 이어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넷째 유다가 그 가문을 잇고 그의 자손들로부터 후손들이 이어져 종국에는 그리스도 예수님이 탄생하게 된다. 유다 또한 그 옛날 옛적에 중동지역에서 한 부족으로 살면서 양이나 염소를 주로 기르는 유목민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시절에는 장가간 맏형이 후손이 없이 죽고 형수가 혼자 남으면 그 다음 형제가 형수와 결혼하여 집안의 대를 이어가야하는 계대관습이라는 게 있었다. 이 관습은 그 부족내에서는 누구나 꼭 지켜야하고 이를 어길시에는 죽음도 감수해야 할 정도의 강제법이나 다름없었다. 유다는 아들 셋이 있었는데 장남과 차남은 성인이었으나 셋째는 둘째와 나이차가 많은 미성년자였다. 맏형인 장남이 이웃마을 처녀 다말과 혼인을 하여 신접살림을 차렸으나 무슨 연유인지 아이를 낳지 못하고 일찍 죽고 말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둘째 아들한테 명령 하여 “네 형이 저렇게 일찍 세상을 떠났고 네 형수가 자손이 없이 혼자되었으니, 우리 부족의 관습대로 둘째 네가 네 형수를 아내로 맞아 우리 집안의 대를 잇도록 네 역할을 다하라”고 했다. 둘째는 그 부족의 관습대로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자기형수 다말과 합방을 하여 부부로서의 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형수가 낳을 아들이 자기가 낳은 아이일 망정 본인이 아닌 형의 대를 잇는 자식이라는 생각이 들자 형수 다말로 하여금 아이를 낳게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자기 부인이 된 형수 다말은 어떻게 하든 집안의 대를 잇고 아내로서의 의무를 다하고자 아이 갖기를 지극히 바라고 또 간절히 원하였다. 그러나 결국 그 둘 사이에는 아이가 태어나지 못했다. 그러자 그 둘째 아들은 하나님의 진노로 벌을 받아 알 수 없는 사유로 일찍 죽고 말았다.
그래서 그 시아버지 유다는 할 수 없이 며느리 다말을 불러 심심한 위로와 함께 ″셋째는 네가 보다싶이 아직 나이가 어린 미성년자인데 지금 결혼을 시키면 자기 형들과 같이 일찍 죽을지도 모르니 네가 친정에 가서 수절하면서 정숙히 생활하고 있으면 그가 성년이 되었을 때 다시 우리집으로 불러 서로 합방을 허락하겠다″고 굳게 약속을 하고 그녀를 친정으로 보냈다. 하릴없이 친정으로 내려간 며느리 다말은 셋째가 성년이 되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시아버지유다가 신신 당부한대로 과부의 옷을 입고 항상 정숙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셋째가 성년된 날이 몇 해가 지나도 시댁으로부터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며느리 다말이 친정으로 온 후에 시어머니는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홀아비로 혼자 사는 양치기 시아버지가 양털 깍는 일로 자기마을에 왔다는 얘기를 정말 우연히 듣게 되었다.
며느리 다말은 수 많은 갈등과 번뇌 속에 아주 굳은 결심을 했다. 평소에 입었던 정숙한 과부 의복을 벗어 버렸다. 그리고 얼굴을 너울로 가리고 몸을 휩싸는 옷으로 갈아입고는 누구인지를 전혀 알아볼 수 없게 완벽히 창녀로 변장하였다. 겉 모습을 완전히 딴판으로 변장한 며느리 다말은 마을 어귀에 나가 시아버지 유다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마을 어귀를 지나가던 시아버지 유다는 창녀가 손님을 기다리는 것으로만 알았지 자기 며느리 다말인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유다가 그녀 곁에 가서 “나로 네게 들어가게 하라”하니 다말이 “그렇게 하면 내게 무엇을 주겠느냐”고 묻자 “염소새끼를 주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그녀는 ″염소새끼를 받을 때까지 당신이 지금 갖고 있는 도장, 허리끈 그리고 지팡이를 맡기라″고 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 그녀는 그 너울을 모두 벗고 청순한 과부의 의복으로 다시 갈아 입고 지난 날과 같이 아주 정숙한 생활을 했다. 이후 시아버지 유다는 친구에게 염소새끼를 주면서 그녀에게 갖다주고 담보로 맡겼던 도장, 허리끈 그리고 지팡이를 찾아오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친구가 아무리 수소문해 봐도 그 마을에는 창녀 자체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 후 3개월 쯤 지나서 시아버지 유다가 소문에 듣자하니 친정에 가 있으라했던 자기 며느리 다말이 행실이 좋지않아 임신했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불같이 화를 낸 시아버지 유다는 당장 며느리 다말을 불러다 불에 태워죽이라고 명령했다. 불려온 며느리 다말이 도장, 허리띠 그리고 지팡이를 내 보이며 이 물건의 임자로 인하여 임신하였다며 이 임자가 누구냐고 따졌다. 그 물건들을 알아본 시아버지 유다는 “네가 나보다 옳다. 네게 셋째를 주지아니하였음이로다”했다.
그렇게 태어난 아기는 장차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성인 예수님의 집안을 지키고 대를 이었다. 여자이면서 아내였고 며느리였던 그녀는 헤아릴 수 없는 수모와 역경을 이겨냈다. 아! 얼마나 고뇌에 찬 결정이었겠는가? 그녀가 얼마나 현명한 판단을 했고, 얼마나 간절함을 가졌던가를 보여주는 역사적인 첫 기록이다(성경 창세기 38장). 그 간절함은 하나님도 감동하셨다. 당시 모든 사회의 권력과 부로 힘을 쥐고 있던 자들은 남자들이었고 특히 권위주위적인 시아버지들이었다. 남자가 여자의 용기와 선견과 지혜를 인정한 이 세상의 첫 사례였다.
나는 몇년전 어느 여고에서 재능기부 강의를 마치면서 이렇게 마무리했다. "분초를 다투며 바꾸어져 가는 이 세상! 이 땅의 딸들아 무엇이 두려운가? 혹시라도 나는 여자여서라며 망서리는 경우가 있는가? 유리 천정이 허물어 지고 4차 산업사회로 진입한지는 이미 오래다. 5G 시대에 포노 사피엔스들(Phono sapiens : 스마트폰을 신체의 일부처럼 사용하는 사람)로 넘쳐나는 이 세상. 여자라서 못 할 일은 없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 다말이 없었다면 그리스도 예수님도 없었다. 이 세상 절반은 너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