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0월 31일 일요일 일본에서는 제49회 총 465명의 중의원을 뽑는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임기는 4년이다. 미국의 상.하원제도와 비교한다면 일본 중의원은 하원에, 참의원은 상원에 해당한다. 대통령 중심제인 미국과 달리 일본은 의원 내각책임제를 실시하고 있다. 다수당의 당수가 내각 총리가 된다. 일본의 중의원은 미국의 하원보다도 더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다. 중요한 의사결정은 최종적으로 참의원보다 중의원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총리는 임기중이라도 중의원 해산권을 가지고 있으며 총선을 치룰 수 있다. 이번의 경우도 정치일정상 임기 며칠을 앞두고서 중의원을 해산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4년 임기를 다채운 경우는 1976년으로 단 한 차례였다고 하니 총리의 권한이 막강한 것 같다.
이런 중요한 총선거에서 우리식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않는 부분들이 있다. 일본 투표방식은 이렇다. 후보자의 기호나 이름이 없는백지 투표용지에유권자가연필을 사용하여자필로후보자의 이름을 쓰는 방식이다. 볼펜이나 만년필 등은 번질 염려가 있어서 안되고 반드시 연필로 적어야 한다. 일부 예외가 인정되기는 하나 이름은 반드시 한자나 히라가나로만 적어야 한다. 한 획만 틀려도 무효가 된다. 무효처리되는 표가 상당수 발생하여 부정선거 시비가 끊이질 않는다고 한다. 우리나라 처럼 기호로 정당과 후보자의 이름이 모두 적힌 투표용지의 해당란에 기표하는 것과 너무 다르다.
일부에서는 자필로 기재하는 방식이 후진적이라고 지적한다. 이에대해 이 방식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첫째 투표용지의 기재 순번에 따른 유불리가 없다는 점, 둘째 후보자의 이름도 모른 상태에서 무조건 1번을 찍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는 점, 셋째 필적이 구분되어 대량의 조직적인 부정을 막을 수 있는 장점 등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위에서 주장한 장점들에 대해 우리나라와 같은 기표 방식을 택한다면 어떨까?. 첫째 문제는 입후보한 정당별 후보자의 기호순서를 무작위로 추첨해서 정하면 될 일이고 둘째 문제는 첫째 문제만 해결된다면 자연히 해소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셋째 문제는 지금과 같은 첨단 과학 시스템으로 얼마든지 보완 가능한 문제아닌가 싶다. 이러한 투표방식을 두고 1994년에 공직선거법을 개정해 투표용지에 도장을 찍는 방법으로 개정했지만 지금까지 시행이 안되고 있다고 한다. 물론 기표방식을 택한 우리나라도 기호1번은 국회 제1당이 차지하긴하다. 이것도 개선되야할 일종의 기득권인 셈이다.
일본에서 이런 제도가 계속 유지되고 있는 이면에는 기존의 이권과 기득권이 크게 도사리고 있다고 한다. 개표는 당연히 수작업으로 이루어진다. 지지자의 이름을 자필로 써야하는 수기라 무효표 여부를 꼼꼼히 가려야 한다. 투개표에 더 많은 시간과 인력이 소요됨은 불문가지다.
각 지자체에 연필을 납품하기 원하는 업체들은 매 선거시마다 지속적으로 납품하기를 원한다. 이들은 볼펜이나 만년필 등 유사업체의 진입을 막는다. 선거 관리에 필요한 보조자들을 동원하는 일을 주업으로 하는 사람이나 단체가 생긴다. 복잡한 투개표 과정에 인력을 동원하는 일이 이들에게는 큰 이권이 걸린 사업인 것이다. 각 지자체 공무원들도 복잡하고 번거로운 선거로 많은 시간을 소비한다. 그들은 매 선거철마다 고액을 야근수당과 특별수당 명목으로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별다른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다. 세습정치인이나 기성 정치인들은 제도개선에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한다. 기표소에 들어선 유권자가 지지후보자의 이름을 까먹었을 경우 기존에 알고 있는 후보자를 기재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는 '개선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모든 관계자들이 알고 있으나 개선에는 소극적이다. 그 이면에는 기득권을 계속 유지하면서 각자가 속하는 입장에서 개인적인 잇속 챙기기에 바쁜 것이다.
이번에 치러진 중의원 총선거를 며칠 앞두고 있었던 일이다. 일부 지방 공무원들이 선거에 쓸 연필을 깎고 있다고 해서 인력낭비라며 크게 보도된 적이 있다.(주1). 과거 선거 때에는 기표소에서 하나의 연필로 계속 사용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코로나 전염 예방을 위해 기표자가 사용한 연필을 가져가도록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같으면 비닐 장갑을 비치하고 사용후 휴지통에 버리게 했을 것이다. 우리나라 기자가 일본 정부 관계자에게 비효율적인 투개표 프로세스 개선을 제안했더니 이렇게 답했단다.(주2) "투표라는 신성한 행위를 하는데 본인이 선택한 사람이 누구인지 신중히 고민해야 하며 그런 의미에서 후보자 이름을 한 획 한 획 정성들여 쓰는 것이 중요한 일 아닙니까?"라고 했다고 한다. 그 기자는 "답하는 의미는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지만 이상과 현실이 동떨어진 상황에 할 말을 잃었다"고 했다.
소규모 모임에서는 누구에게 투표하는지가 공개되면 후보자와 투표자간의 상호간에 나쁜 감정이 남을 수 있다. 또 편가르기라는 부작용도 생긴다. 투표 후의 서로간에 있을 원만한 사회관계를 고려해야 한다. 어린 시절 반장선거도 그랬다. 그래서 우리는 곧잘 백지에 기명식 투표를 한다. 그러나 수천만 명이 참여하는 투표에 기명 투표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일본 선거제도의 장점이나 그 사회의 관습 등을 이해하고 인정해야 함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비효율성이나 모순점을 개선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한다면 선뜻 수긍이 가지않는다. 지구촌이 하나로 연결되고, 첨단 과학이 우주를 날고 있는 시대에 옛 관습에 너무 집착하는 것 같다.
기득권을 가진 소수는 사적인 욕심에 도취되어 계속 따뜻한 걸 즐기기만 한다.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다수는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다수는 영문도 모르고 시나브로 병들어간다. 그러는 사이 국가나 사회전체가 어느새 삶은 개구리 신세되는 것은 시간 문제다. 너도 죽고 나도 죽는다.
기술혁신을 거듭하며 삼성과 LG가 LCD, OLED 등으로 평판 TV를 만들 때 일본의 소니, 파나소닉 등은 세계를 제패하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브라운관 기술에만 집착했다. 현재 일본 전자업체들의 몰락을 보라. 당시만 해도 반도체 선진국임을 내세우며 자만했던 일본아니었던가? 우리는 남들이 자기를 부러워하고 올려볼 때가 가장 위험한 위치에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상대를 살피고 더 분발하고 겸손해야 할 때인 것이다. 국가도 기업도 개인도 매한가지다.
일본의 모습이 우리의 반면교사됨은 명백하다. 우리도 모순되고 비효율적인 것들을 찾아내고 더 과감히 개선해 나가야 함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런 점에 있어서 일본은 이 시대 우리에게 실질적인 스승이된 셈이다. 긍적적인 측면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