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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마키 Oct 19. 2021

그린 파파야 향기

비엣남의 여름, 가고파라-


1951년 베트남 사이공에 한 부유한 집이 있다. 죽은 남편을 기다리며 2층에서 누워만 있는 할머니, 하루 종일 빈둥빈둥 밥 먹고 악기만 다루며 집 나갔다가 돈 떨어지면 돌아오는 생활을 반복하는 한량 남편,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공허함으로 집안을 혼자 돌보는 마님, 아빠를 닮은 큰아들, 우울하고 결핍되어 보이지만 엄마를 헤아릴 줄 아는 예민한 둘째 아들, 무이를 괴롭히기만 하는 막내아들. 이러한 가족에 주인공인 무이가 하녀로 들어가서 생활하는 내용이다. 어린 무이는 예쁘고 착하고 성실하고 순수하다. 누구나 마음속에 이런 무이 같은 아이가 있었겠지?


1994년에 개봉한 <그린 파파야 향기>는 가볍게 한마디로 말하자면 첫사랑에 성공한 하녀의 인생 역전극이다. 어릴 때 부유한 집의 하녀로 들어간 집에서 큰 도련님의 친구인 잘생긴 쿠옌 도련님을 연모하다 10년 뒤 성인이 된 후 쿠옌 도련님 집에 하녀로 들어가 새 삶을 시작한다. 거기서 쿠옌 도련님은 부유한 약혼자와 즐겁게 만나면서도 하녀에게 관심을 갖는다. 둘은 서로 눈이 맞아 쿠옌 도련님은 글을 모르는 하녀에게 글을 가르치며 깊은 관계로 발전하여 영화 마지막에 하녀가 쿠옌 도련님의 아이를 임신한 엔딩이 나온다. 


<그린 파파야 향기 The Scent of Green Papaya, 1994>



중학교 3학년, 수업 중간에 미술학원 선생님이 어떤 영화를 봤는데 영화에 나오는 아역이랑 나랑 닮았단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 영화가 바로 '그린 파파야 향기'인데 어렸을 때 그 말을 듣고 사춘기 시절 호기심에 본 영화를 까맣게 잊고 있다가 왓챠에 떠서 오랜만에 봤다. 나이 들어 다시 보니 어릴 때 안보였던 새로운 게 보이더라.

영화는 언뜻 보면 지루하다. 스토리도 없고 대사도 없고 악기 소리와 벌레소리뿐, 무언가 빠진듯한 심심함이 있다. 그리고 모기향 또는 인센스를 피운 것 같은 향 냄새만이 지독히 풍겨온다. 그러나 정갈하게 파파야를 채 썰고 피쉬소스를 뿌리는 클로즈 업같은 미장센, 베트남의 이국적인 풍경과 화면 연출이 오묘하면서 감각적으로 다가온다. 나는 클래식에 대해 잘 모르지만 '지적 허영심'때문에 관심은 많은데, 쇼팽의 전주곡 24번과 드뷔시의 달빛이란 곡도 감각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베트남 영화이지만 프랑스 영화 느낌이 많이 난다는 감상평도 많다. 그 이유는 트란 안 홍 감독이 베트남 사람이지만 프랑스에서 활동한 감독이라고 한다. 그래서 더 묘한 느낌이 나는 것 같다. 1000년 동안 중국의 지배를 받고 60년 가까이 인도차이나를 점령한 프랑스로 인해 동서양이 어우러진 문화를 가진 베트남의 아름다운 풍경을, 프랑스 세트장에서 촬영한 영화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영화의 프레임 속에 잘 담아뒀다. 영상이 아름다워서인지 칸 영화제에서 황금 카메라상을 받았다. 


영화의 스토리는 간단하게 약혼자를 빼앗은 하녀 이야기이다. 하지만 스토리보다 일상의 사소한 일들의 묘사, 곤충 등의 자연물을 클로즈업하는 등 오감을 풍부하게 만든다. 주로 시각과 청각을 자극해 감성을 깨우고 야생적이면서 덜 익고 설익은 원초적인 영화로까지 느껴진다. 그러면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아주 살짝 미묘하게 괴기스러운 부분까지도 느껴진다.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의 감상은 더운 여름날 땀 흘리며 흙바닥을 맨발로 걸어 다니는 느낌이랄까?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느낌이랄까. (벌거벗은 누드의 느낌이 드는 건 나만 이래? 나만 쓰레기야?) 

말로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함 때문에 중학생 때 본 이 영화가 간간히 떠올랐다. 무슨 그리움, 추억 때문에 그랬는지 몰라도.


잎이 넓은 초록 식물들, 벌레들의 울음소리    


파파야는 베트남 사람들이 즐겨 키우는 식물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마당에 호박 같은 작물을 기르는 것처럼 베트남 사람들은 파파야 열매를 기른다고 한다. 영화를 보면 어린 무이나 성인 무이가 버리는 재료인 파파야 열매 속 씨를 만지고 쳐다보는 장면들이 나온다. 이 장면에 많은 의미가 담겨있지 않을까? 

무이 자체를 보면 엄마도 보고 싶고 집안일도 고되지만 슬픔에 그다지 마음을 쓰지 않는다. 다만 모든 걸 호기심 어린 때 묻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현실에 없는 만화 같은 캐릭터이면서 나와는 반대되는 무이를 보면서 위로를 받는다. 어떤 상황에도 행복해질 줄 아는 능력 같은 것.

 


숨 막히는 습한 여름 하면 떠오르는 동남아. 더운 나라 이미지인 홍콩, 대만, 태국은 가봤어도 베트남만 못 가봤다. 베트남의 무이네랑 다낭이 그렇게 좋다던데 언제 한번 가봤으면 좋겠다.

파파야가 맛있게 익어가는 것처럼 내 인생도 잘 익어갔으면.


'그린 파파야 향기'는 이국적이고 앤티크 한 고 가구를 바라보는 느낌이 드는 영화이다.

정갈하면서 습하고 끈적한 영화이면서 섬세하게 베트남을 표현한 영화를 보고, 커다란 웍에 푸른 채소를 기름에 들들 볶아 먹는 맛이 궁금한 비엣남 가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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