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는 중입니다만
8월에 대학원을 졸업하고, 학교 근처 지하철 입구역에 작업실을 얻은 적이 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선배면서 같은 동네에 사는 언니와 함께 생전 태어나 처음으로 부동산을 통해 발품 팔아 공간을 얻었다. 그때 반지하부터 옥탑방까지 꽤 여러 곳을 보러 다녔다. 적당한 공간, 거리, 층수의 공간을 보게 되었는데 높은 가격에 둘이서는 부담이 되어 같이 작업실 쓸 의향이 있는 학과 사람들을 모았다. 8살 차이 나는 고등학교 선배이자 시크한 개그를 날리는 귀여운 딸이 있던 아버님, 고등학교 선배이자 같은 동네에도 살고 10년 연애 후 당시 (아마 지금까지도?) 자유로운 연애관을 가졌던 언니 1, 서른 되기 전 결혼이 목표라 전문직을 찾아다닌 소개팅 결과 전문직과 연애하고 있던 언니 2 (결국 결혼 골인), 그리고 극 진보와 극 보수와 같은 언니 1과 언니 2 사이의 중도 같은 나. 이렇게 4명이서 같이 작업실을 사용했다.
공간만 같이 사용할 뿐 4명이 모였던 적은 거의 없었고 주로 내가 매일 나오긴 했다. 자주, 그리고 규칙적으로라도 있어야 생산적인 일을 하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작업실 주변엔 먹을 곳이 없었고 식당이 있다 하더라도 멀리 걸어가서 그다지 먹고 싶지 않은 한식을 먹어야 했다. 정오쯤 일어나 집에서 늦은 아침 겸 점심을 간단히 먹고, 작업실에 도착해서 잠시 멍을 때리다가 그림을 그렸다. 늦게까지 있는 날이면 밤 12-1시까지도 있었다. 학교 안의 실기실만 쓰다 밖으로 나오니 책임감이라는 게 생겼다. 주로 내가 작업실 반장 같은 느낌이 되어 처음으로 형광등을 사서 갈아보기도 하고 화장실 변기커버 같은 용품까지 구매했다. 내가 이런 것까지 해야 하나 하며 눈물 찔끔 나올 때도 있는 반면 내가 이렇게 어른이 되었구나 하며 뿌듯도 했었다. 수도세와 전기세 통지서도 처음 받아봐 현실의 숫자를 체감하기도 했다. 전기세가 조금이라도 적게 나오기 위해 작업실 출퇴근할 때마다 콘센트를 뽑고 다녔더니 그걸 본 언니 1은 나를 보며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며 답답해했다. (나름 절약정신...)
단조로운 생활과 외진 주변 환경 덕에 시각적인 자극을 받을 일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그때 당시 만났던 친구도 지루했어서(미안하지만 안 미안) 그때의 내 시간은 모든 면에서 다 지루했다. 작업은 자주 멈췄고, 그리고자 하는 것이 없을 땐 괜히 작업실 주변을 맴돌거나 (사실 과자 사러 마트를 제일 많이 갔다), 라디오를 들었다. 이때 초등학교 입시 시절 이후로 라디오를 가장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오전부터 심야방송까지 질리게도 들었다.
나의 경우, 그림을 그릴 때에 당시의 주변 환경과 상황, 그로 인해 내게 형성되는 감정들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불안했던 나의 초기 미대생 시절 내가 상대의 뮤즈가 되길 원하기도 하고 뮤즈를 찾아 상대의 얼굴, 몸을 관찰하여 그리기도 했다. 학교 다닐 땐 영화 <허니와 클로버> 속 주인공과 같이 빨간색의 큰 닥터드레 이어폰을 끼고 다니며 의사와 약사들이 입는 흰색 실험용 가운을 걸치고 그림을 그렸다. 가운은 팔이나 몸통 부분에도 물감을 묻힐 수 있어서 앞치마보다 편했다. 매일같이 가운을 입고 다니는 내게 조교 언니는 '선배 언니도 의사 가운 입다가 의사랑 결혼했는데 마키도~ 나중에 의사랑 결혼하는 거 아니야~?'라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는데.. 쩝:)
나는 당장 몇 개월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앞날들 때문에 몹시 불안에 떨다가도 어떤 때는 갑자기 돌변하여, 마치 달관했단 듯이 회의적인 태도를 가지기도 한다. 그리고 나의 논문 주제 또한 그렇다. 연애할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이런 나의 감정 기복은 대학 들어와서 일 줄 알았는데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은 내가 고등학생 때부터 그랬단 거다. 아무튼 이러한 태도를 가지고도 그림을 그렸다. 그래서 그림들은 대부분 적막하지만, 혼란스러운 나 자신과 맞닿아 있다. 토끼 그림을 그린 어느 날, 작업실 같이 쓰는 언니 2가 내 그림을 보며 토끼 눈이 무섭다며 너의 심리가 이렇냐고 했다. 음 난 있어 보이게 그린 건데 그런가?
나의 그림들을 봐주었으면 하는 관심종자 같은 마음과 동시에 내 마음이 들킬까 봐 두려운 마음도 든다.
난 언제 또다시 전시를 할 수 있을까? 언제까지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다시 그릴 수는 있을까?
워낙 재능이 뛰어난 친구들이 많아 그림 그리는 주체를 떠나 그림을 바라보는 입장인 갤러리와 미술관에서 일하다 보니 그림을 대하는 태도 또한 달라지게 되었다. 이렇게 그림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일을 꾸준히 못하는 건지 쉽게 질리는 성격인 건지 아직도 진로를 못 찾는 건지 모르겠다만 3년 주기로 항상 직장이 바뀌었다. 이번에도 3년을 채우고 작가와 작품을 가까이 대하는 곳을 떠나 새로운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사실 몇 년 전부터 생각했던 일이고 다른 친구들이 먼저 하고 있을 때도 부러웠다. 봄 여름부터 열심히 준비해서 드디어 행동으로 실천하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항상 해왔던 게 미술이라 아예 다른 세상으로 가는 것은 아니지만 퇴사 10년도 아니고 5년도 아닌 청담 라이프에서의 고작 3년이지만 내가 다른 일도 잘할 수 있을까, 그다음 과정에도 길이 있을까 하는 싱숭생숭한 마음이 든다. 열심히 버틴 나에게 퇴사 기념으로 꽃 사주세요.. :)
맥락 없지만 이럴 땐 제주를 가는 것이다.. :) 내 사랑 마마롱 카페를 향해. (너무 이상화해서 정작 가면 실망할까 봐 겁남)
(아래 글인 '고등어'와 같은 맥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