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을 줄 아는 용기
지금도 뻔하지 않은 게 좋다.
난 어릴 때부터 뻔한 게 싫었다. 학창 시절에도 하찮고 짓궂은 농담해대는 남자아이들을 보면 속으로 '쯧쯧 언제 철들래'라고 생각했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면 모든 건 다 (오은영 효과인지 모르겠지만) 가정교육인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아빠와 오빠가 살짝 마초에 가부장적인 면이 없잖아 있어서 나는 우리 집 남자들과 다른 다정한 남자를 만날 거야 라는 생각을 했다. 내 기준 하찮은 친구들은 그저 친구로만, 그러면서 얼굴이 뽀얗고 스마트해 보이고 다정하고 욕하지 않고 야한 농담도 하지 않는 나이스 한 남자 사람을 보면 마음 한편 동경의 대상으로 바라보았다. 다들 뻔하고 뻔한데 어째서 뻔하지 않을까? 그런 사람들은 나와 항상 물리적, 심리적 거리가 멀었다. 어릴 땐 그러지 않았어도 나이 먹고 뻔해지는 사람도 있다.
나와 멀어서 유니콘처럼 보이는 것일까? 하지만 유니콘 같은 사람도 있더라. 가령 동갑친구와 풍파 없이 10년 넘게 연애해서 30대 중반에 결혼하는 사람. (동경의 대상 중 한 명이었던 선배 오빠가 내년에 결혼)
만날 때마다 매번 동일한 주제, 같은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다. 또는 나만 말하고 내게 질문조차 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전에 만났을 때 얘기한 건데' 이후에도 이런 생각이 반복되면, 나는 기억하는데 이 사람은 기억을 못 하나 보네 라며 날 형식적으로 만나는 걸까? 마지못해 억지로 만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내게 관심이 없구나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빈말과 인사치레는 항상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내게 진심을 표현해준다면 좋을 텐데. 대체 이 사람은 어느 누구에게 솔직할까? 나는 너에게 관심이 무척이나 많은데 나 혼자 가지면 뭣하나.
며칠 전 친구를 만났다.
나는 핸드폰을 쭉 갤럭시만 써오다 처음으로 아이폰 12 연보라를 사게 되었다. 안드로이드에서 애플로 넘어오다 보니 적응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지만 좋은 점은 이모티콘 사용으로 항상 애플의 이모티콘이 부러웠다. 그래서 이모티콘을 쓸 때 살짝 뿌듯함이 있다. 나의 이런 핸드폰 역사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 대뜸 친구가 너 핸드폰 언제 바꿨어? 원래 갤럭시만 쓰잖아 언제 아이폰으로 갈아탔어?라는 말을 했다. 그 말에 나는 사랑과 감동을 느꼈다. 또 사촌동생이 향수 사업을 한다며 차량용 디퓨저 2개를 줬다. 산건 아니고 사촌동생에게 받은 거라 말했지만 나는 닭살이 돋을 만큼 큰 감동을 받았다. 친구에게도 계속 '나 너무 감동받았어 감동이야!'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내게 했던 질문을 또 하는 사람 말고, 나의 사소한 변화까지 알아차리는 사람. 얼마나 고맙고 사랑인가.
내가 관심을 줘도 돌아오는 게 없는 사람을 놓을 줄 아는 용기. 내게 따뜻한 관심을 가져다주는 사람만 챙기기에도 인생은 짧다.
내가 이상한 말과 행동을 해도, 서운함을 토로해도 꼬였다고 말하지 않고,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있는 그대로를 바라봐주는 사람이 좋다.
간혹 여자이기 때문에 여자로서 받는 무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당황스럽다. 2022년 중반이 넘어가는 현재, 몇 개월 뒤면 곧 2023년이다. 그런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아직 80년대에 머물러있나 보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에게 몇 번이나 만나보자고 했던 6살 어린 연하남이 있었다. 그런 연하남들에게조차 들어보지 못한 여성의 생리학적 시간에 대해 말이 나오면 남자가 더 많이 많이 많이 중요한 걸로 알고 있는데 WHAT? 할 말을 잃는다. 본인은 인지 못하고 상대만 탓하는 일종의 이기심이다. 수명도 길어져 의료기술도 좋아져 이제는 여자 나이 상관없이 모든 것이 축복이다. 설령 어려운 문제라 할지라도 같이 슬픔을 헤쳐나갈 줄 아는 남자들의 마음자세가 먼저다. 이 딴 거 다 필요 없고 남녀의 사랑이 먼저 아닐까? 나와 동갑인 순하고 착한 남자 사람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는 연하만 만나왔다. 딱히 연하를 추구한 건 아니지만 어쩌다 만난 사람이 연하였을 것이다. 그 친구와 연애 얘기를 하다가 본인은 오히려 동갑이 더 좋고 40대 연상을 만나도 전혀 상관이 없다고 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는데 소수의 황당무계한 발언으로 머리를 어지럽히고 싶지 않다.
여성들의 현실이 아닌, 자각하지 못하는 소수 남자들의 현실을 깨달아야 한다.
쉬는 시간이 생긴 틈을 타 홀로 좋아하는 르뱅 쿠키를 얼른 사야지 하고서 돌아오는 길에 쿠키를 먹으려고 화단에 앉았다. 내가 먹고 싶은걸 사고 주위 신경 안 쓰고 먹는 순간 '나 다 컸네 다 컸어'라고 생각했다. 아 진작 좀 이래 볼걸. 옛날엔 주위를 너무 신경 썼다. 타인, 소문, 체면에 신경 쓰다 보니 나 자신을 챙기지 못한 것 같다. 화단 돌에 앉으니 개미가 보인다. 개미만 보여도 싫어하고 옷이나 가방 혹은 다리 위를 지나가면 진저리 쳤는데, 이젠 개미 또한 귀여워 보이고 너도 살아야지. 쿠키 한입 먹으니 바람이 분다.
눈 수술 전후로 안구건조증이 생겨 계절 상관없이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눈물이 흐른다. 그래서 걸어 다닐 때 바람이 조금이라도 불면 휴지를 챙겨 나오지 못할 때 영 성가신 게 아니다. 눈물이 흐르는 채로 쿠키를 먹었다. 다른 건물 창밖에서 나를 봤다면 아마 실연을 당했나 무슨 일이 있나 하며 처연하게 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단지 (안구건조증 때문에) 눈물이 흐른ㄷr...
놓아버리니 짧은 순간, 그 순간이 잠시 행복했다. 오늘이 내 생일 같고 누군지도 모를 그대의 생일 같았다.